지금 같은 분위기에 대해 정지현 얼머스인베스트먼트 이사는 “심사역이 하는 일의 목적은 투자가 아니다”라며 “투자는 과정일 뿐 진짜 목적은 기업의 성장을 돕고 출자자(LP)에게 수익을 돌려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 이사는 지금은 퇴사한 신정섭 전 KB인베스트먼트 상무와의 인연으로 2018년 투자업계에 입문했다.
대기업, 학원 강사부터 벤처기업까지
98학번으로 연세대 생화학과를 졸업한 정 이사의 이력은 독특한 편이다. 졸업 후 대기업에 입사했다 1년 만에 관뒀다. 그다음엔 친구들과 출자를 해 작은 학원을 차리고 수학 강사로 4년 동안 활동했다. 정 이사는 “벤처기업 같은 소규모 조직에서 일하는 데 익숙해진 건 이때부터”라며 웃었다.
학원은 여러 사정으로 4년 만에 문을 닫게 됐다. ‘백수’가 된 그는 대학원으로 향했다. 연세대 의대에서 신경과학으로 2015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2016년엔 비상장기업 뉴라클사이언스에 사업개발팀장으로 입사했다. 정 이사는 “보통 이학박사들이 바이오 벤처기업에 가면 연구원으로 일을 하게 되는데 나는 연구 대신 기술도입(LI) 및 자금유치 등의 일을 도맡아 했다”며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벤처캐피털 네트워크가 쌓이던 중 투자업계로 오지 않겠느냐는 신 상무님의 제안을 받았다”고 말했다.
신 상무와 손양철 얼머스인베스트먼트 대표는 오랜 친구다. 정 이사는 박사학위 과정 중 수행한 중개연구(기초과학을 임상 단계로 연계해주는 연구), 그리고 뉴라클사이언스에서 기술도입 검토 목적으로 후보물질을 평가한 일 등이 심사역을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 보고 투자업계에 입문했다.
구주 인수와 프리IPO 투자에도 적극 나서
얼머스인베스트먼트에선 투자심사역의 권한이 크다. 흔히 ‘딜소싱’이라고 말하는 투자기업 유치부터 투자심사, 기업관리, 펀드관리, 회수까지 심사역이 맡는다. 다만 권한이 막강한 대신 책임도 크다. 정 이사는 “얼머스인베스트먼트는 섹터당 심사역이 1명뿐”이라며 “자기 섹터의 일은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다.
얼머스인베스트먼트의 바이오심사역도 정 이사 혼자뿐이다. 그가 지금까지 투자한 기업은 14개. 그는 “얼머스인베스트먼트가 신기술금융사업자로서 다른 창투사(벤처캐피털)와 다른 점이 있다면 구주 인수, 프리IPO(상장 전 투자) 등 투자 형태를 가리지 않는 것”이라고도 했다.
가령 얼머스인베스트먼트는 RNA 기반 유전자치료제를 개발하는 신약 벤처 바이오오케스트라에 지난 1월 구주 인수를 통해 투자했다. 정 이사는 “바이오오케스트라는 2019년부터 눈여겨보고 있던 기업이었으나 좀처럼 투자 기회를 잡기가 어려웠다”며 “RNA 기반 유전자치료제의 전망이 밝다고 보고 구주 인수를 통해서라도 투자 기회를 잡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그는 “구주 인수에 참여한다 해도 파트너사로서 적극적인 경영 지원에 나선다면 신주 투자와 무엇이 다르겠느냐”며 “구주 인수에 대한 부정적인 시장의 인식도 바뀌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구주 인수자는 보통 경영이나 회사의 성장에 도움은 주지 않고 수익만 보고 투자한다는 VC업계의 시선에 대해 반박한 것이다. 정 이사는 “앞서 말한 것처럼 투자 심사역이 하는 일의 목적은 투자 그 자체가 아니라 기업의 성장과 출자자의 수익”이라며 “구주를 인수한 기관투자가도 충분히 해당 기업의 성장 파트너가 될 수 있고 해외에선 이런 ‘세컨더리 시장’이 아주 활발히 운영되고 있다”고도 했다. 그는 “특히 바이오오케스트라의 주요 적응증이 치매 등 중추신경질환이고 본인의 전공이 신경과학이기 때문에 왕성한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있다”며 웃었다.
정 이사는 프리IPO 투자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딜 소싱의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투자자들의 관심이 적은 초기 기업 투자 비중을 늘리는 벤처업계의 흐름에 다소 역행하는 부분이다. 프리IPO 투자는 장단점이 명확하다. 회수 방향과 시기가 어느 정도 결정된 기업에 투자하는 만큼 손실을 볼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적고, 단기간 내 투자금 회수가 가능하다는 것이 장점이다. 단, 위험(리스크)이 적은 만큼 초기 투자에 비해 수익률이 낮다. 보다 이른 시기에 투자한 기관투자가보다 높은 밸류로 투자해야 하는 것도 단점이다.
정 이사가 프리IPO로 투자한 대표적인 기업은 큐로셀과 피노바이오, 지피씨알 등이다. 그는 “구주 인수든 프리IPO든 투자 방식에는 차이가 있지만 오랫동안 지켜봐온 (팔로업) 기업에만 투자한다는 것이 철칙이다”고 말했다.
정 이사는 큐로셀에 프리IPO를 통해 지난해 투자했지만 이 기업과의 인연은 201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 이사는 “환자로부터 채혈한 피를 기반으로 만드는 키메릭 항원수용체 T세포(CAR-T)는 ‘로컬 비즈니스’가 될 수밖에 없다고 봤다”며 “큐로셀은 국내 CAR-T 기업 중 진도가 가장 빠른 전도유망한 기업이었다”고 말했다.
정 이사가 꼽은 큐로셀의 ‘매력포인트’는 베스트 팔로어 전략이다. 그는 “킴리아, 예스카타 등 상용화된 CAR-T와 표적(CD19)이 같아 성공 가능성이 높으면서도 개선점을 넣어 차별화했다”고 말했다. 그는 항체전문가와 유전자치료제 전문가가 한데 모인 사내 인력 구성이 좋다고도 덧붙였다.
하지만 큐로셀은 한동안 정 이사에게 ‘그림의 떡’이었다. 투자 경쟁이 치열해 좀처럼 투자할 기회를 잡기가 어려웠다. 2018년 11월 첫 미팅을 시작으로 정 이사는 3개월마다 큐로셀이 있는 대전을 직접 찾았다. ‘삼고초려’보다 더한 지극정성을 보인 끝에 성과가 있었다. 정 이사는 “김건수 대표가 말하길, 구내식당에서 함께 밥을 먹은 심사역은 내가 처음이라 했다”며 “다음 라운드 때 투자금을 받겠다는 김 대표의 약속을 따냈다”며 웃었다. 결국 김 대표는 프리IPO에서 정 이사와의 약속을 지켰다. 얼머스인베스트먼트는 큐로셀에 30억 원을 투자했다.
정 이사는 다국적 제약사와 공동개발을 적극적으로 논의하고 있는 벤처기업 지피씨알에도 지난 2월 프리IPO 단계에 투자했다. 이 회사는 고형암 발생과 치료에 관계된 G단백질의 작용기전에 대한 특허를 보유했다. 그는 “보통 벤처기업은 물질특허를 보유하는데 이 회사는 특이하게 작용기전에 대한 특허를 등록했다”며 “해당 기전에 알맞을 것으로 보이는 물질을 물색해 도입(LI)하는 독특한 방식으로 연구개발을 하고 있다”며 “안전성을 입증한 물질 위주로 임상 2상부터 준비하는 전략이 주목할 만하다”고 말했다. 정 이사가 투자한 금액은 30억 원이다.
초기기업에도 투자
프리IPO는 투자기간이 짧다는 장점이 있지만 이는 때에 따라 단점이 되기도 한다. 지금처럼 증시가 박스권 또는 하락장일 때는 손실을 볼 가능성이 커진다. 상장을 앞둔 기업에 투자하는 만큼 주당 비싼 가격에 신주를 사들이기 때문이다. 정 이사는 “최근엔 초기 기업에도 관심을 갖고 투자하고 있다”고 말했다. 카이팜과 노벨티노빌리티, 셀인셀즈 등이 얼머스인베스트먼트가 투자한 대표적인 초기 기업이다.
카이팜은 인공지능(AI)을 활용한 신약 개발 기업인데 DNA가 RNA로 전사되고, 단백질을 만드는 ‘센트럴 도그마’에 집중했다는 차별점이 있다. 정 이사는 “보통 AI 신약 개발 업체들은 오픈 소스를 이용하는데 이 기업은 독자적인 데이터를 구축해 고도화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했다”며 “특히 단백질이 만들어지기 전 RNA 단계에 작용하는 약물 개발에 강점을 보이고 있다”고 덧붙였다.
노벨티노빌리티는 국내 기업에 기술이전(LO)을 한 경험이 있는 박상규 아주대 약학대 교수가 2017년 설립한 신약 벤처다. 항체에 기반한 항암제와 안구질환 치료제를 개발 중이며, 얼머스인베스트먼트는 지난해 1월 시리즈A에 일찌감치 투자했다. 호주에서 임상 1상을 앞두고 있다. RNA 진단 기술을 보유한 진단업체 제노헬릭스에도 파트너스인베스트먼트와 함께 올해 초기 투자했다. 정 이사는 “30개 표적을 동시에 볼 수 있는 RNA 시퀀싱 기술을 가진 회사”라며 “RNA 진단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 기업이란 기대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치킨게임이 시작됐다
앞으로의 투자는 어떨까. 국내 증시 상황은 점점 안 좋아지고 있다. 특히 바이오 분야가 그렇다. 대형 바이오주들의 주가가 맥을 못 추고 있다. 벤처캐피털들이 프리IPO 투자 비중을 줄이고 초기투자 비중을 늘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 이사는 바이오 시장이 산업 특성상 많은 혜택을 받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적자를 내고, 성공을 장담할 수 없음에도 많은 바이오 기업이 대규모 투자금을 끌어모았다. 이는 ‘바이오 버블론’이 꾸준히 제기되는 배경이기도 하다. 그는 “기술 기반 산업은 한 번씩은 다 거쳐가는 일”이라며 “과거 정보기술(IT)가 그랬고 이제 바이오 섹터에도 차례가 왔을 뿐”이라고 말했다.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일부 바이오 기업들의 시가총액이 무너지는 조정의 시기가 도래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그는 “엄격한 기준으로 기업을 평가하지 못하면 남는 건 ‘치킨게임’뿐”이라며 “A라는 회사가 높은 밸류를 받았으니 B도 높아야 한다는 식의 투자는 멈춰야 바이오산업이 건전한 성장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우상 기자
*이 기사는 <한경바이오인사이트> 매거진 2021년 12월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