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의 화롯불처럼 연주한 브람스
해는 점점 짧아진다. 낙엽은 차가워진 바람을 타고 흩날린다. 가을의 한가운데서 인생의 가을인 중년과 노년을 생각한다. “젊음은 아름답지만, 노년은 찬란하다. 젊은이는 불을 보지만, 나이든 사람은 그 불길 속에서 빛을 본다”고 대문호 빅토르 위고는 말했다. 용광로 같은 젊음의 발산은 압도적이지만 일회성이다. 오래 은은한 빛을 남기는 화롯불 같은 노년의 에너지는 박하우스가 연주하는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떠올리게 한다.

브람스는 피아노 협주곡 2번을 48세 때 작곡했다. 그보다 20년 앞서 작곡한 1번과 사뭇 다르다. 직선적인 1번에 비해 곱씹으며 에둘러 간다. 브람스는 1878년 봄과 1881년 봄, 두 차례에 걸쳐 이탈리아를 여행했다. 북독일적인 차분함과 중후함 속에 이탈리아적인 밝은 명랑함이 함유된 까닭이다. 깊고 어두운 숲속 한 조각 햇빛처럼 단맛을 키우는 소금 역할을 한다.

피아노의 대가였던 브람스는 피아노와 오케스트라가 융합된 교향적인 작품을 구상했다. 오케스트라의 구성미는 더욱 견고해졌고, 능숙한 솜씨만큼 피아노와 오케스트라 모두를 아우르는 수준이 높아졌다. 고전주의 시대의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스케르초풍의 2악장을 덧붙이는 시도로 4악장의 형식을 갖춰 교향곡에 접근시켰다. 당시 유행하던 거장들의 협주곡처럼 피아노를 화려하게 기교적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관현악에 융합시키고 있다.

빌헬름 박하우스는 1884년 독일 라이프치히에 태어나 영국 런던, 미국, 오스트리아, 스위스에서 살았다. ‘건반 위의 사자왕’이란 별명처럼 씩씩하고 꿋꿋한 독일적 연주를 하는 그는 견고한 뼈대 위에 모든 요소가 유기적으로 어우러지게 해 소리를 낸다. 그런 박하우스지만 83세 때인 1967년 녹음에서는 온화하고 서정적인 노년의 빛을 발한다. 열 살 연하인 73세 카를 뵘이 지휘한 빈필하모닉의 격조 높은 울림과 함께한 녹음은 이 작품의 대표반으로 손꼽힌다.

1악장의 호른과 피아노의 응답은 흡사 구름과 산의 모습이다. 2악장의 격렬한 피아노도 실제가 아니라 내면의 외침 같다. 바릴리 4중주단의 첼리스트이기도 한 빈필 수석 에마누엘 브라벡이 연주하는 3악장의 첼로 독주는 가을볕처럼 따사롭고 아가페적인 사랑처럼 자애롭다. 먹먹하고 명상적인 피아노가 채워가는 중간에 이어 다시 첼로가 드리우는 아름다운 장면이 인상적이다. 4악장의 밝은 표정, 탄식 어린 질문과 답변 같은 악구는 떠나기 전 세상과 삶에 대한 찬가를 떠올리게 한다. 힘과 기교로만으론 연주되지 않는 노년의 지혜 같은 연주가 펼쳐진다.

박하우스의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으로는 이 녹음 외에 동일 라인업의 1968년 잘츠부르크 실황(오르페오), 카를 슈리히트가 지휘한 빈필과의 1952년 모노 녹음(데카)도 추천한다. 뵘이 지휘한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와의 1939년 녹음(EMI)은 다소 낡았지만 중년의 사자왕을 만날 수 있다.

류태형 < 음악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