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도 함락되지 않았던 산성…한 해 300만명 순례 이어져
[imazine] 대한민국 구석구석, 영화가 되다 ① 남한산성
'영화 속 그곳'은 작품의 공간이다.

'그곳'은 내가 갔을 때 특별해진다.

추억의 장소가 된다.

예술과 그리움의 변주가 시작된다.

◇ 한국판 버킷리스트:유나이티드 컬러즈 오브 코리아(United Colors of Korea)
미국 아카데미 상을 2년 연속 받은 한국 영화는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감염병이 터지기 전 영화 제작은 한 해 100편을 넘었다.

전국 곳곳은 영화 촬영 중이고, 대한민국 구석구석은 영화가 된다.

내가 이미 가본 장소라면 '영화 속 그곳'은 내 추억의 빛깔을 띤다.

거꾸로 영화의 서정을 좇아 내가 찾는 '그곳'은 영화의 빛에 물든다.

우리가 사는 곳이 예술, 추억과 뒤섞일 때 삶은 풍요롭다.

2007년 제작돼 세계적으로 흥행한 영화 '버킷리스트'(The Bucket List)의 제목은 한국에서도 '꼭 하고 싶은 일들'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다.

이 영화의 성공 요인은 단순했다.

세계 유명 관광지를 보여준 데 있었다.

평생의 소망을 이루는 것에 앞서 환상적이리만큼 아름다운 장소를 펼쳐 보인 것 자체에 감동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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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강우석 감독이 만들었던 '고산자, 대동여지도'는 김정호(차승원 분)가 지도를 만들기 위해 두 발로 조선 팔도를 누비는 내용이다.

황매산을 뒤덮은 붉은 철쭉 무리, 파도가 부서지는 새파란 제주 해안의 순결한 햇빛, 아득하게 이어지고 사라지는 산들의 줄기…. 극장 화면을 가득 채운 산하의 아름다움이 선명했다.

사계절 색깔이 다른 한반도의 아기자기한 멋이야말로 'K-뷰티'(K-Beauty), 한국의 아름다움이다.

K-뷰티들이 뭉쳐져 만들어내는 '유나이티드 컬러즈 오브 코리아'(United Colors of Korea)는 한국판 버킷리스트가 되리라.
장소를 보여주는 것이 주목적인 영화는 적지 않다.

주제나 스토리는 장소를 부각하기 위한 핑계인 경우도 있다.

2010년 줄리아 로버츠가 주연한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Eat Pray Love)도 비슷하다.

새로울 것 없는 이 주제를 펼치기 위한 무대는 이탈리아, 인도, 발리였다.

세련되고 화려한 액션 영화가 주는 흥분의 절반은 홍콩, 싱가포르, 파리, 뉴욕, 리우데자네이루 등 촬영지의 박력 넘치는 스카이라인에서 온다.

그만큼 장소는 그 자체로 마음을 움직인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은 사람의 발걸음을 가볍게 만들었다.

두 발로 걷는 동물은 이제 여행을 새로운 본능으로 획득한 듯싶다.

◇ 망월봉을 성안으로 끌어들이다
한 해 300만 명 이상이 남한산성을 찾는 것은 성을 폭 감싸고 있는 자연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또 400년 전 짓밟힌 자존이 아직도 아프기 때문이다.

남한산성을 찾는 안식과 순례의 발길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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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에 씻긴 성벽이 물오르는 숲 사이로 뻗어 계곡을 건너고 능선 위로 굽이쳤다'. 영화 '남한산성'의 원작 소설 저자인 김훈이 서문에 쓴 글이다.

남한산성을 버킷리스트 1호로 올린 것은 뚫고 오르고 꺾는 성벽의 역동성을 가까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고구려, 신라, 백제가 치열한 영토 다툼을 벌였던 한반도에는 삼국시대 때부터 산성이 많았다.

오랜 세월을 견딘 석성의 단단함과 의연함은 사람을 매혹한다.

이곳을 리스트에서 빼놓을 수 없는 더 큰 이유는 남한산성의 현재성이다.

영화 남한산성은 2017년 개봉했다.

그해 경북 성주에 배치된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 체제)는 중국의 대대적인 경제보복을 몰고 왔고 한국은 큰 타격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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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강대국 명나라와 신흥 강국 청나라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벌여야 했던 과거 조선의 처지는 세계 유일 강대국 미국과 이에 도전하는 중국 사이에 낀 현재 한국의 곤궁함과 다르지 않다.

외교 노선을 둘러싸고 안에서 벌이는 공허한 말싸움이나 외교의 길을 잃고 갈팡질팡하는 안쓰러움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 나지 않는다.

소설 '남한산성'은 영화 개봉 전에만도 100쇄를 찍었다.

소설이 불러낸 조선의 외교와 국방 실패, 백성이 겪은 참상은 반향이 컸다.

영화는 무겁고 어둡다.

영화에 든 관객은 공식 기록으로 384만 명이다.

몇 년 동안 공들여 찍은 제작 비용을 제할 수 있었을까 싶다.

유쾌하지 않은 역사물이 대박을 터트리리라고 황동혁 감독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원작 소설의 줄거리는 처절하다.

비극을 낱낱이 각인시키려는 듯 문장들은 강렬하다.

감독은 그 절박함에 포획되지 않았을까.

흥행에 성공했다고 할 수 없지만 어려운 주제를 고려할 때 결코 관객이 적었다고 할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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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국과 대국이 부딪히는 경계에 위치한 한반도에 외교는 숙명적 난제다.

남한산성을 향하던 날 마음 한구석에는 풀리지 않는 숙제의 답이 그곳에 있을지 모른다는 희미한 기대가 웅크렸다.

성의 중심인 '남한산성 로터리'에 도착하니 망월봉이 빤히 보였다.

로터리 바로 위쪽에 임금의 거처였던 행궁이 있었다.

1636년 12월 2일 청나라 태종은 10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 침략을 시작했다.

병자호란이다.

청은 12월 9일 압록강을 건넜고 조선은 13일에야 청의 침입 사실을 알았다.

14일 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했고 16일 청은 성을 포위했다.

명과 단교하고 자신들과 군신 관계를 맺을 것을 요구하며 쳐들어온 청의 눈앞에서 인조는 1637년 1월 1일 행궁 뜰에 나와 명나라 황제를 향해 새해 인사를 올리는 춤을 춘다.

나라가 거꾸로 매달린 위난 속에서 인조가 춘 춤은 조선 조정의 무능과 어리석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병자호란 9년 전인 1627년 청의 전신인 후금은 조선을 침략했고 인조와 대신들은 강화도로 피란했다.

병자호란 전조였던 정묘호란이다.

조선은 두 차례의 국난을 겪으면서도 명의 몰락과 청의 부상이라는 국제 정세를 읽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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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태종의 침략을 당하고서도 명나라와의 의리를 저버릴 수 없고, 오랑캐인 여진족이 세운 청과 외교를 맺을 수 없다는 명분론에 빠져 있었다.

청의 요구를 거절하면서 침략에 대비하지는 않았다.

청은 후에 역사상 세계에서 4번째로 큰 제국으로 성장한다.

청 태종이 인조의 춤을 내려다보던 지점이 망월봉이다.

청이 신무기 홍이포를 발사해 행궁을 유린했던 곳도 망월봉이다.

망월봉과 행궁 사이 거리는 족히 몇 ㎞는 될 것 같았다.

파란 하늘을 이고 솟은 망월봉은 행궁을 정확히 조준했던 청의 무기 기술을 증언하는 듯했다.

전술 고지인 망월봉은 원래 남한산성 바깥에 있었다.

지금은 망월봉이 성 내부에 있다.

전쟁이 끝난 뒤 조선이 망월봉의 중요성을 깨닫고 이곳을 둘러싸는 외성을 쌓았기 때문이다.

성안으로 들어온 망월봉이 반갑다.

인조는 47일 동안 성안에서 버티다 1637년 1월 30일 송파강 삼전 나루로 나가 청 태종에게 삼배구고두례를 하며 항복한다.

조선 조정이 청에 항복했지만, 청의 군대가 성안으로 들어오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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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은 1624년 인조 2년에 축조된 뒤 한 번도 적에게 함락되지 않았다.

남한산성 원성의 둘레는 약 8㎞였다.

청의 침략 후 옹성과 외성을 보강한 뒤 둘레는 약 12㎞로 확장됐다.

행궁은 임금이 서울을 떠나 도성 밖으로 행차할 때 임시 거처하는 곳이다.

남한산성 행궁은 병자호란 후 숙종, 영조, 정조, 철종, 고종이 다녀갔다.

우리나라 행궁 중 유일하게 종묘와 사직을 두고 있었다.

유사시 임시 수도였다.

◇ 양지바른 남한산성
남한산성은 해발 480m가 넘는 험준한 자연 지형을 따라 지어졌다.

통일신라가 당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해 지었던 토성인 주장성을 기초로 건축됐다.

'주장'(晝長)이란 낮이 길다는 뜻이다.

행궁 안에는 광주부 유수의 집무실이었던 일장각이라는 건물이 있다.

'일장'(日長)이란 해가 길다는 의미다.

남한산성은 높은 산에 둘러싸였으나 일조량이 많다.

산성 내 분지의 해발 고도 역시 150m가량으로 높아 산 정상과 분지의 고도차가 크지 않기 때문이다.

산성길을 따라 걸으면 높은 산세는 수려하고 걷는 발길은 편안하다.

한 바퀴 도는 데 1∼2시간이면 될 듯하다.

서문에 서면 한강과 남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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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중국, 일본 등 1∼3위 경제 대국에 둘러싸인 한국에 외교는 국가 생존과 직결된다.

그런데 친미, 친중, 친일, 반미, 반중, 반일 등 외교 노선을 둘러싼 내부 갈등이 어지럽다.

남한산성에 근무하는 김규선 광주시 문화관광해설사의 지론은 명료했다.

그는 "편 가르기 수렁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편은 별도의 바구니에 담아놓고 실리를 취해야 한다"고 말했다.

실리는 국민을 편안하고 잘 살게 만드는 쪽에 있을 것이다.

김훈의 산문 '찻잔 속의 낙원'에 '무릇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고 사람은 나라를 가리지 않는다'라는 구절이 있다.

하동 쌍계사 마당에 있는 진감국사대공탑비의 비문이다.

글 읽는 후인들이 그 문장을 두려워한다고 김훈은 덧붙였다.

남한산성 순례는 자연과 삶의 지속성을 떠올린다.

변화하는 국제 정세에 국가가 대응하지 못할 때 짓밟히는 인간의 존엄을 돌아보게 한다.

영화는 전쟁이 끝나고 백성들이 성안으로 돌아와 봄 농사를 준비하는 것으로 끝난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1년 9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