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발굴조사 결과 발표…출토 유물 거의 없어
"무령왕릉보다 조성 시기 늦을 가능성 커"
백제 왕릉급 무덤 '송산리 29호분', 88년만에 다시 드러났다
일제가 1933년 조사한 공주 송산리고분군의 백제 왕릉급 무덤인 이른바 '송산리 29호분'이 88년 만에 다시 이뤄진 발굴조사를 통해 모습을 드러냈다.

무덤 주인을 유추할 수 있는 유물은 나오지 않았으나, 위치나 구조 면에서 송산리고분군의 핵심 유적인 무령왕릉보다 조성 시기가 늦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분석됐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와 공주시는 일제강점기에 조사했으나 그 현황과 위치가 정확히 알려지지 않은 송산리 29호분을 발굴해 규모가 왕릉급이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했다고 28일 밝혔다.

백제 왕릉급 무덤 '송산리 29호분', 88년만에 다시 드러났다
송산리고분군은 백제 웅진도읍기(475∼538) 왕릉과 왕릉급 무덤이 모인 곳이다.

발굴 50주년을 맞은 무령왕릉과 1∼6호분으로 명명된 고분 등 무덤 7기가 정비돼 있다.

계곡을 사이에 두고 서쪽에 발굴 50주년을 맞은 무령왕릉과 5·6호분이 있고, 동북쪽에 1∼4호분이 존재한다.

1∼5호분은 백제의 전형적 무덤 양식인 횡혈식 석실분(橫穴式石室墳·굴식 돌방무덤)이고, 무령왕릉과 벽화가 있는 6호분은 벽돌(전돌)을 쌓아 조성한 전축분(塼築墓)이다.

이번에 연구소가 조사한 29호분은 6호분으로부터 남서쪽으로 약 10m 떨어진 곳에서 나타났다.

29호분, 6호분, 5호분은 삼각형을 이루며, 북쪽 꼭짓점에 해당하는 6호분의 북동쪽에 무령왕릉이 위치한다.

일제강점기에 교사이자 도굴꾼이던 가루베 지온(輕部慈恩)이 29호분의 존재를 알아냈고, 이후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 등이 정식으로 조사해 장신구·철기 조각·관못 등을 찾았다.

29호분이 그간 주목받은 이유는 무덤방의 벽체는 1∼5호분처럼 깬돌인 할석(割石)을 썼지만, 바닥과 관을 두는 관대(棺臺) 두 점은 무령왕릉이나 6호분처럼 벽돌을 깔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특징은 일제강점기에 촬영된 유리건판 사진에도 남아 있다.

백제 왕릉급 무덤 '송산리 29호분', 88년만에 다시 드러났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관계자는 "29호분과 비슷한 무덤이 5호분으로, 5호분은 바닥이 아닌 관대만 벽돌을 써서 만들었다"며 "29호분에 사용된 벽돌은 대부분 무늬나 글자가 없으나, 무령왕릉 벽돌처럼 연꽃무늬와 '중방'(中方) 글자가 있는 벽돌이 소량 포함됐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사견임을 전제로 "위치와 구조, 유물 등을 고려하면 무령왕릉과 6호분을 만든 뒤 5호분을 조성했고, 그다음에 29호분을 축조한 듯하다"고 말했다.

송산리 29호분은 활처럼 굽은 궁륭식 천장이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상부가 일제강점기에도 이미 유실된 상태여서 하부 조사가 집중적으로 진행됐다.

무덤방인 현실(玄室) 규모는 남북 길이 340∼350㎝, 동서 길이 200∼260㎝로 파악됐다.

이는 송산리 1∼4호분과 유사하고, 6호분보다는 큰 것으로 평가된다.

관대 길이는 동쪽이 약 250㎝이고, 서쪽이 약 170㎝이다.

무덤방 벽면은 깬돌을 쌓고 안에 회를 칠해 마무리했으며, 입구는 벽돌을 여러 단 올려 폐쇄했다.

고분 입구에서 무덤방에 이르는 길인 연도(羨道)는 동쪽으로 치우쳐 조성했으며, 무덤방과 마찬가지로 바닥에 벽돌을 사용했다.

연도에서 이어지는 무덤길인 묘도(墓道)는 2.7m만 현존하는데, 시작 부분에서 벽돌을 이용해 만든 배수로가 확인됐다.

연구소는 향후 정비를 위해 디지털 기록화 작업을 벌였으며, 가상현실(VR) 제작을 위해 영상을 찍었다.

이를 통해 사라진 상부 구조를 그래픽으로 복원할 예정이다.

연구소 관계자는 "송산리 29호분을 앞으로 어떻게 활용할지는 결정되지 않았다"며 "하반기에는 부여 능산리 고분군의 무덤을 발굴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