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펄마, 당초 평가보고서 안진에 맡겼다가 막판에 무산돼
삼덕에 '안진 자료' 주며 발행 요구…표지만 바꿔 버젓이 제출
사모펀드 눈치 보는 회계법인 "자문 맡으려면 '을' 될 수밖에"
삼덕회계법인 파트너 회계사인 A씨는 2018년 11월 26일 어펄마캐피탈의 B상무로부터 은밀한 제안을 받았다. B씨는 “어펄마가 보유 중인 교보생명 주식(지분율 5.33%)에 대해 신 회장에게 풋옵션을 행사하기로 하고 당초 안진 측에 행사가격 평가를 맡겼으나 최종 보고서를 낼 수 없게 됐다는 통보를 받았다”며 “(사흘 뒤인) 29일까지 보고서를 (신 회장에게) 보내야 하니 안진 보고서 초안과 자료를 가져다가 삼덕 명의로 보고서를 발행해달라”고 부탁했다.
안진 보고서 표지만 바꿔 단 삼덕
B씨는 A씨가 승낙하자 안진이 작성한 자료를 이메일로 송부했고, A씨는 해당 자료에다 표지와 서문만 바꾼 최종 보고서를 삼덕 명의로 완성해 29일 오후 4시께 B씨에게 다시 전달했다. 이 과정에서 안진 측 초안에 있던 사소한 오류조차 수정되지 않고 담기는 등 베껴 쓴 흔적이 고스란히 남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B씨는 약 5시간 뒤 이 보고서를 신 회장 측에 풋옵션 행사가격 제시용으로 공식 제출했다.어펄마는 왜 이렇게 무리한 일을 벌여야 했을까. 어펄마가 신 회장의 친인척 지분(5.53%)을 2007년 인수할 때 체결한 계약서에 따르면 풋옵션 행사가 이뤄지면 어펄마와 신 회장 측이 각각 독립적인 회계법인을 선임한 뒤 해당 회계법인이 행사일로부터 15일 안에 주식평가 보고서를 제출하도록 했다. 어펄마가 풋옵션을 행사하고 안진을 평가기관으로 선임했지만 앞서 어피너티 의뢰를 받아 동일한 용역을 수행 중이던 안진 측이 제출 기한을 단 3일 앞둔 시점에서 “(어피너티와 어펄마가 동일 회계법인을 선임한 데 대해) 이를 문제 삼지 않겠다”는 신 회장의 동의서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계약이 막판에 무산됐다. 상식적으로 신 회장이 이를 문제 삼지 않을 리 없다는 것을 안진이나 어펄마 측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검찰에 의해 기소된 건 어펄마가 아니라 삼덕이었다. 앞서 검찰이 올해 초 안진과 어피너티 사건에 대해 양측 관계자들을 모두 기소한 것과도 다른 결과다. 안진 소속 회계사들은 어피너티의 청탁을 받고 가능한 한 어피너티 측에 유리한 방법으로 행사가격을 부풀렸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용역비 외에 향후 제기될 소송 등 법률 비용을 어피너티 측이 모두 부담하겠다는 약속을 받는 등 부당한 이득을 취한 혐의도 제기됐다.
법조계 관계자는 “검찰은 안진과 어피너티가 풋옵션 행사 가격 산정과정에서 서로 공모하고 그 대가로 금품 제공을 약속하는 등 공인회계사법상 허위 보고 및 부정 청탁 혐의가 모두 성립한 것으로 판단한 것”이라며 “반면 어펄마와 삼덕은 대가 관계가 명확하지 않아 일단 공인회계사의 허위 보고 혐의만 적용해 어펄마를 (기소 대상에서) 제외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한국경제신문은 이 같은 검찰 기소와 관련한 해명을 요청했으나 삼덕 측은 “드릴 말씀이 없다”며 언급을 피했다.
사모펀드 앞에서 무력한 회계법인
삼덕회계법인 사건에 대해 한 대형 회계법인 출신 회계사는 “최근 감사인지정제 부활 등으로 대기업을 상대로는 독립성 및 공정성이 과거에 비해 크게 강화됐지만 사모펀드 앞에서는 여전히 ‘고양이 앞에 쥐’에 불과한 실정”이라고 털어놨다. 그는 “삼일·삼정KPMG·딜로이트안진·EY한영 등 4대 회계법인조차 사모펀드가 주관하는 수천억~수조원대 인수합병(M&A) 거래의 자문이라도 맡으려면 철저하게 ‘을’이 될 수밖에 없다”고 고백했다.또 다른 관계자는 “만약 시한이 너무 촉박했다면 삼덕이 용역을 수주할 수 없다고 거절했어야 맞다”며 “심지어 경쟁사가 만든 보고서 초안을 고스란히 자기가 쓴 것처럼 꾸며 회사 명의로 발행한 것은 누가 봐도 부끄러운 일”이라고 지적했다.
■ 풋옵션
put option. 미래의 특정 시기에 일정한 가격에 되팔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어피너티컨소시엄 등이 대우인터내셔널 등으로부터 교보생명 지분을 인수하면서 대주주인 신창재 회장에게 풋옵션을 행사할 수 있는 계약을 맺었다.
이호기/정소람 기자 h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