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들 "여전히 원통"…책임 절감하고 치유 방법 모색해야
[기자수첩] 나쁜 어른들이 가두고 자행한 '서당 폭력·학대'
어느 시대나 그 사회를 떠받치는 교육의 산실이 있기 마련이다.

고대 그리스에 아카데미아가 있었다면, 우리는 서당이 그 역할을 했다.

서당은 18세기 들어 상업 발달로 인한 부농 증가로 신분 상승의 장이자 과거 시험이라는 입시 위주 교육시설로 성격이 변하기도 했다.

그러나 서당의 설립 취지는 어디까지나 유학 공부를 통해 사물의 이치를 깨닫는 인성교육을 기본으로 하는 것이었다.

서당 훈장은 식사, 잠자는 시간까지 하루 24시간을 학생들과 같이 생활했다.

부모를 대신해 온종일 학문뿐만 아니라 사람됨을 가르쳐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말까지 들었다.

경남 하동 서당에 벌어진 일련의 폭력은 상업적으로 변질한 현대의 서당에서 자격을 상실한 어른으로 인해 아이들이 고통받은 비극적 일이었다.

특히 원통함은 하동 폭력 사태를 취재하면서 만난 모든 피해 학생들이 공유하던 정서였다.

사전적 의미로 원통함은 가슴 속 응어리를 풀지 못해 한이 된 고통이다.

미국의 작가 린 맥폴은 이를 '용서와 잊기를 거부하고, 누군가 행했던 부당함에 대한 생생한 감각을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우아하게 표현했다.

그렇다면 하동 서당 피해 학생들은 왜 원통한 감정을 가슴 속에 품고 살아야만 했는가 질문을 던져야 한다.

고통스러운 과거를 잊고자 하는 마음은 누구나 마찬가지다.

고통의 부피가 너무 커 감당할 수 없어지면 무의식이 나서 그 기억을 강제로 지우기도 한다는 게 현대 심리학의 가르침이다.

하지만 누구도 그들의 목소리를 귀담아듣지 않았기에 피해 학생들은 인간의 원초적인 방어기제마저 거스르며 '고통의 생생한 감각'을 유지하고자 했다.

[기자수첩] 나쁜 어른들이 가두고 자행한 '서당 폭력·학대'
하동 서당은 사실상 '문제아 수용소'나 다름없었다.

이곳 아이들은 부모의 동의를 받고 외부와 연락이 차단된 채 외출의 자유마저 제대로 누리지 못했다.

규칙을 정하는 게 어른이고 그것을 따르는 게 아이라면, 이 관계를 성립할 수 있게 하는 주춧돌은 아이에 대한 어른의 책임이다.

어른의 단단한 보호가 없다면 아이가 행복해질 수 있는 권리 또한 모래성처럼 쉽게 무너지고 만다.

자유를 박탈하고 강제로 집단생활을 하며 체벌을 당해야 '아이다운 아이'가 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어른다운 어른'이 맞는 것인가.

물론 속사정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아이들의 서당 생활에는 이혼과 같은 '어른들의 사정'이 슬쩍 개입하기 때문이다.

진실은 대개 복잡하다지만, 그 복잡한 진실을 만든 당사자가 바로 어른이란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한다.

어른이 책임을 망각하면 아이는 고통을 껴안고 살아야 한다.

그렇기에 서당에서 10년 넘게 온갖 잔혹한 폭력과 학대가 자행되는 동안 어른들은 눈을 돌리고 있었다는 비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피해 학생들은 자신들에게 닥친 시련에 순응하는 대신 고통스럽더라도 기억하고 고발하는 쪽을 택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배울 수 있다.

어떤 감정적 자해는 그 자체로 곧 세상에 대한 저항이라는 것.
그래서 맥폴은 '애도가 사랑하는 대상을 떠나보내는 슬픔이라면, 원통은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이 박탈된 슬픔'이라고 지적했다.

더 까다로운 질문은 그다음에 나온다.

서당에서 비극적인 일이 발생했다면, 이에 대한 책임은 누구의 몫이며 남은 이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가해자 몇몇을 색출한 뒤 법정에 세워 법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겠다.

그러나 가해자에 대한 단죄가 피해자의 치유로 곧장 이어지는지 우리는 반문해볼 필요가 있다.

[기자수첩] 나쁜 어른들이 가두고 자행한 '서당 폭력·학대'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일본의 정신과 의사 노다 마사야키는 자신의 저서 '떠나보내는 길 위에서'를 통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가해자는 용서해줬으면 좋겠다, 잊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 이야기를 서두른다.

가해자의 전략은 자신들도 피해자라고 믿는 것, 그리고 사고를 잊는 것이다.

'
적어도 우리는 가해자의 태도를 답습하지 않았으면 한다.

책임의 전가 대신 슬픔의 공유를 통해 더디지만 조금씩 전진하는 방법을 함께 찾았으면 한다.

때마침 경남도교육청이 유사 사태 재발 방지를 위한 종합 대책을 내놨다.

모두의 시선이 서당 전수조사 결과에 쏠려있을 때, 기관과 기관의 경계와 책임을 넘어 위기 학생을 지원할 수 있는 경남형 플랫폼 구축에 매진하겠다고 하니 반가운 소식이다.

계속 하동 생활을 이어가야 할 아이들을 세심하게 배려해 다시는 이와 같은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길 바란다.

바로 며칠 전은 바로 세월호 참사 7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이 사고로 수학여행을 가던 단원고등학교 2학년 학생 248명을 포함해 모두 304명이 희생당했다.

한 세월호 생존 학생은 '우리가 어른이 되었을 때 어린 학생들에게 또다시 지금과 같은 나쁜 세상을 물려주지 않게 도와달라'는 편지를 남겼다.

그날 이후로 우리 사회는 얼마나 달라졌는가.

나쁜 어른들이 나쁜 세상을 필사적으로 지켜낼 동안 아이들의 절박한 호소는 봄날의 벚꽃처럼 덧없이 지고 있다.

나 또한 어느새 '나쁜 어른'이 되고 말았다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나도 모르게 가해자의 태도로 피해자들을 다루는 기사를 쓰지는 않았나 모르겠다.

따라서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겠다.

아이가 아이답지 않다는 이유로 제도권 밖으로 추방해버린 우리 어른 모두가 경찰 조서에서 이름 지워진 공동정범이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