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 한시로 만나다] 우주를 껴안다, 김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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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를 껴안다
김세연
꽃을 보듯 그대를 보고
그대를 보듯 꽃을 본다
봄바람에 실려 온 꽃향기
마음의 문을 두드린다
그 향기 다할까
문 활짝 열어
와락 우주를 껴안는다
꼼짝 마라, 그대
이제 내 안에 있으니
[태헌의 한역]
擁太空(옹태공)
看君若看花(간군약간화)
看花若看君(간화약간군)
花香乘春風(화향승춘풍)
暗暗敲心門(암암고심문)
開門憐香盡(개문련향진)
猛然擁太空(맹연옹태공)
千萬勿欲動(천만물욕동)
君今在吾中(군금재오중)
[주석]
* 擁(옹) : ~을 껴안다. / 太空(태공) : 먼 하늘, 우주(宇宙). 이 시에서는 우주의 뜻으로 사용하였다.
看君(간군) : 그대를 보다. / 若(약) : ~과 같다. / 看花(간화) : 꽃을 보다.
花香(화향) : 꽃향기. / 乘(승) : ~을 타다. / 春風(춘풍) : 봄바람.
暗暗(암암) : 몰래. / 敲(고) : ~을 두드리다. / 心門(심문) : 마음의 문.
開門(개문) : 문을 열다. / 憐香盡(연향진) : 향기가 다할까 아까워하다.
猛然(맹연) : 갑자기, 와락.
千萬(천만) : 절대로, 결코. / 勿欲動(물욕동) : 움직이려고 하지 말라.
今(금) : 이제, 지금. / 在吾中(재오중) : 내 속에 있다, 내 안에 있다.
[직역]
우주를 껴안다
꽃을 보듯 너를 보고
너를 보듯 꽃을 본다
봄바람을 탄 꽃향기가
몰래 마음의 문 두드린다
향기 다할까 아까워 문 열고
와락 우주를 껴안는다
절대 움직이려 하지 마라
그대 이제 내 안에 있으니
[漢譯 노트]
노래가 가수의 전유물이 아니듯 시 역시 시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위의 시를 쓴 김세연씨는 시집을 낸 적도 없고, 그렇다고 문학잡지 등에 시를 게재한 적도 없다. 그러나 시에 대한 열정만큼은 여느 시인들 못지않아 회원 수가 어지간한 SNS 시가문학 동호회에서 공동 관리자로 맹렬하게 활동하며 간간이 자작시를 발표하기도 한다. 역자가 위의 시를 만난 것은 바로 이 동호회의 게시판에서였다.
역자는 언제부턴가 처음 접하는 시를 보게 되면 한역(漢譯)이 가능할지를 우선 가늠해보는 묘한 버릇이 생겼다. 이 시는 일독을 마치자마자 한역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퍼뜩 스쳤다. 제법 여러 날이 지나 약속 하나가 취소되어 시간을 주운 듯한 느낌이 들던 어느 한적한 오후에, 이 시가 용케 뇌리에 떠올라 다시 찾아 읽어보고 시험 삼아 한역을 해보게 되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한역시의 압운이 저절로 들어맞았다. 압운자가 저절로 들어맞는다는 것은 압운자 때문에 고민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뜻이므로, 한역을 하는 사람에게는 거의 무임승차나 마찬가지이다. 그리하여 언젠가는 이 시를 한번 소개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왔던 것인데 그 언젠가가 바로 오늘이 되었다.
역자가 보기에 이 시의 제1행과 제2행은 단순한 병렬이 아니라 선(先)과 후(後), 혹은 인(因)과 과(果)의 관계로 연결된 시행(詩行)으로 파악된다. 옛날에는 꽃을 보듯 그대를 보았는데 이제 그대를 보듯 꽃을 보고 있다는 뜻이니 꽃은 곧 그대의 화신(化身)이나 다름없다. 간단히 꽃이 곧 그대라는 것이다. 제1행과 제2행을 이렇게 이해해야만 그 다음 시행과의 연결 고리가 만들어진다.
이 시에서 시적 화자에게 그리움을 격발(擊發)시키게 한 범인은 ‘그대’가 아니라 ‘봄바람’이다. 이 봄바람이 꽃향기를 실어와 마음의 문을 두드렸고, 결국 그 문을 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꽃의 정령(精靈)은 향기이고, 그 향기를 머금고 있는 우주(宇宙)를 내가 마침내 껴안았으니 꽃 또한 나에게 안긴 것이 된다. 그리하여 꽃인 ‘그대’는 이제 내 품 안에 있는 거나 진배없다. 그러니 ‘그대’는 이제 꼼짝 마라는 것이다. ‘그대’가 누군지는 몰라도 시적 화자에게 단단히 잡힌 몸이 된 것은 분명하다.
이 시에서의 ‘그대’는 아마 지금은 곁에 없지만 시적 화자가 사랑했던 사람이고 지금도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 사람일 듯하다. 어쩌면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가슴 속 그리움만 꽃향기만큼 짙어갔을 법하다. 그럼에도 ‘그대는 내 안에 있다.’고 함으로써 ‘그대’와의 격절(隔絶)을 한스러워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이 시는 나태주 시인의 시 <내가 너를>에 나오는 명구(名句) “나는 이제 너 없이도 너를 좋아할 수 있다”와 맥락이 닿는다고 할 수 있다. 또 이 시의 제1행은 나태주 시인의 시집 제목인 ≪꽃을 보듯 너를 본다≫에서 힌트를 얻었을 것으로 보이므로 이래저래 이 시는 나태주 시인의 영향을 많이 받은 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역자는 4연 9행으로 이루어진 원시를 두 수의 오언고시(五言古詩)로 재구성하였다. 두 수 모두 각기 4구로 짝수 구에 압운하였으며 그 압운자는 ‘君(군)’과 ‘門(문)’, ‘空(공)’과 ‘中(중)’이다.
2020. 5. 19.
강성위 한경닷컴 칼럼니스트(hanshi@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