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 한시로 만나다] 겨울나무, 이재무

겨울나무



이재무



이파리 무성할 때는


서로가 잘 뵈지 않더니


하늘조차 스스로 가려


발밑 어둡더니


서리 내려 잎 지고


바람 매 맞으며


숭숭 구멍 뚫린 한 세월


줄기와 가지로만 견뎌보자니


보이는구나, 저만큼 멀어진 친구


이만큼 가까워진 이웃


외로워서 더욱 단단한 겨울나무



[태헌의 한역(漢譯)]


冬樹(동수)



樹葉盛時相不見(수엽성시상불견)


天亦自蔽足底冥(천역자폐족저명)


霜降葉落風數打(상강엽락풍삭타)


歲月恰如孔穴生(세월흡여공혈생)


只以幹枝欲堪耐(지이간지욕감내)


始見遠友與近隣(시견원우여근린)


冬樹覺孤煢(동수각고경)


是故尤硬堅(시고우경견)



[주석]


* 冬樹(동수) : 겨울나무.


樹葉(수엽) : 나뭇잎. / 盛時(성시) : 성할 때, 무성할 때. / 相不見(상불견) : 서로 보이지 않다.


天亦自蔽(천역자폐) : 하늘 또한 스스로 가리다. 하늘마저 스스로 가린다는 의미로 쓴 말이다. / 足底冥(족저명) : 발아래가 어둡다.


霜降(상강) : 서리가 내리다. / 葉落(엽락) : 나뭇잎이 지다. / 風數打(풍삭타) : 바람이 자주 (~을) 때리다.


歲月(세월) : 세월. / 恰如(흡여) : 흡사 ~와 같다. / 孔穴生(공혈생) : 구멍이 생기다, 구멍이 뚫리다.


只(지) : 다만, 그저. / 以幹枝(이간지) : 줄기와 가지로써, 줄기와 가지를 가지고. / 欲堪耐(욕감내) : 감내하려고 하다, 견디려고 하다.


始見(시견) : 비로소 ~이 보이다. / 遠友(원우) : 보통은 멀리 있는 벗을 가리키나 여기서는 멀어진 벗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였다. / 與(여) : ~와, ~과. / 近隣(근린) : 보통은 가까운 이웃을 가리키나 여기서는 가까워진 이웃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였다.


覺孤煢(각고경) : 외로움을 느끼다.


是故(시고) : 이 때문에. / 尤(우) : 더욱. / 硬堅(경견) : 단단하다.



[직역]


겨울나무



나뭇잎 무성할 때는


서로가 보이지 않고


하늘 또한 스스로 가려


발밑 어두웠는데


서리 내려 잎 지고


바람 자주 때리자


세월은 마치


구멍이 뚫린 듯하지


그저 줄기와 가지로만


견디려고 하자니


비로소 보이는


멀어진 친구와 가까워진 이웃…


겨울나무는 외로움 느끼나니


그래서 더욱 단단하지



[漢譯 노트]


평상시에는 보이지 않다가 상황이 달라지거나 각도가 달라지면 잘 보이는 것들이 있다. 일이 그렇고, 물건이 그렇고, 사람이 그렇고, 글 또한 그렇다. 이 말을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어느 시점에는 우리의 눈을 가리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콩깍지일 수도 있겠고, 씐 혼일 수도 있겠고, 편견일 수도 있겠다. 그것이 무엇이든 애초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어느 때가 되면 보이기도 하는 것을 우리는 거칠게 ‘보임’의 진화(進化)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그런데 나뭇잎처럼 가리고 있던 것이 사라지고 나면 보이는 것들이 그 존재의 본질일까? 그런 것이라면, 다시 말해 벌거벗은 나무가 본질이라면, 나뭇잎을 단 나무는 전부 가식이 되어야 한다. 같은 논리로 맨얼굴이 본질이라면 화장한 얼굴은 가식이 되어야 하고, 본능이 본질이라면 절제가 가식이 되어야 한다. 과연 그러할까? 이에 대한 결론을 내리는 것은 역자의 몫이 아닐뿐더러 이 자리에서 꼭 처리해야 할 일도 아닌 듯하다. 다만 가리고 있던 그 무엇인가가 사라지고 나면 보이지 않던 것이 비로소 보이기도 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시인이 얘기한 “멀어진 친구”와 “가까워진 이웃”은 당연히 멀어진 나뭇가지와 가까워진 나뭇가지에서 힌트를 얻었을 것이다. 나를 등지고 있던 나뭇가지는 자란만큼 더 멀어졌을 것이고, 나를 향하고 있던 나뭇가지는 자란만큼 더 가까워졌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역자는 멀고 가까움은 물리적인 거리가 아니라 그 방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든다.


살다 보면 원래는 볼 수 없는 것인데도 때로 잘 보이는 것이 있다. 우리의 마음이 바로 그러하다. 우리는 참으로 이상하게도 어떤 때는 도무지 보이지도 않은 그 마음을 보여주려고 그렇게 애를 쓰면서도, 또 어떤 때는 훤히 보이는 그 마음 자락을 감추려고 무진 애를 쓰기도 한다. 만일 우리의 마음을 속속들이 비추어줄 수 있는 거울이 있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동화 ≪백설공주≫에 등장하는, 진실만을 말하는 마법의 거울을 가진 왕비의 경우처럼 오히려 불행의 씨앗이 되지는 않을까? 조선시대 박수량(朴遂良) 선생의 다음 시를 보게 되면 그런 거울에 대한 미련은 일단 사라지지 않을까 싶다.



鏡浦臺(경포대)


鏡面磨平水府深(경면마평수부심)


只鑑形影未鑑心(지감형영미감심)


若敎肝膽俱明照(약교간담구명조)


臺上應知客罕臨(대상응지객한림)



경포대


수면이 거울 면처럼 간 듯 평평해도


물의 신이 사는 수부까지는 깊지.


수면은 모습과 그림자만 비출 뿐


사람의 마음까지 비추지는 못하네.


만일 사람의 속마음까지


모두 환하게 비추게 한다면


응당 알게 되리라, 경포대 위에는


임하는 나그네 드물리라는 것을!



역자는 연 구분 없이 11행으로 구성된 원시를 8구로 이루어진 고시(古詩)로 한역하였는데 마지막 2구는 오언구(五言句)로 처리하였다. 짝수 구마다 압운하면서 4구마다 운을 바꾸었다. 그리하여 한역시의 압운자는 ‘명(冥)’·‘생(生)’, ‘인(隣)’·‘견(堅)’이 된다.


2020. 1. 14.


강성위 한경닷컴 칼럼니스트(hanshi@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