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도움을 주던 사람에게 도움을 받을 때도 있고, 지시를 하던 사람에게 지시를 받는 경우도 있다. 갑과 을이 항상 고정된 듯하지만 경우에 따라서 얼마든지 바뀔 수도 있다.



장사는 흔히 신용이 최고라지만 그 신용을 ‘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맞다. 돈이 신용이기도 하다. 하지만 절대적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은행이나 자본가하고의 관계에서이다. 거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거래처하고의 관계에서도 그럴까?

아니다. ‘돈’이 있는 신용도 중요하지만, ‘믿음’이다. 한국은 ‘어음’이라는 제도가 구매처와 판매처간이 관계를 많이 불편하게 한다. 뻔히 현금지불 능력이 있음에도 일부러 어음으로 지불한다. 그리고 많은 경우 어음은 좋지 못한 생각을 갖는 사람들이 한탕을 할 때 많이 써먹는 수단이기도 하다. 그래서 요즘은 어음보다는 당좌수표나 가계수표를 더 선호한다. 왜냐하면 어음은 순전히 ‘민사상의 문제’라서 구매하는 회사가 지불을 하지 않더라도, 민사재판으로 해결해야 한다. 하지만 당좌거래난 가계수표는 바로 상대방을 고발하고 형사사건으로 진행되어 구속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제도상 여러 가지 결제수단이 있지만,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어느 만큼 믿을 수 있는 가의 문제로 귀착이 된다. 서로를 믿지 못하면 어느 결제수단을 이용해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난 그래서 가장 무서운 신용은 바로 거래처로부터 받는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흔히 무시하기 쉬운 신용이 바로 ‘구매처’에 대한 신용이다. 비즈니스의 세계는 항상 ‘갑(구매처)’와 ‘을(판매처)’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첫 사업을 ‘구매실패’로 성공하지 못한 나는 판매만큼이나 구매처 관리도 신경을 썼다. 나는 이제껏 거래하면서 한 번도 어음이나 당좌수표를 쓰지 않았다. 내가 계산이 얕아서 그런지 몰라도 어차피 어음만기가 4개월이라면 3달뒤에는 내가 지불해야 할 금액이 어음을 써서 3개월의 자금여유를 가지나, 안 가지나 마찬가지의 금액이 된다. 그러니까 매달 100만원의 구매결제액이 들어오는 데, 3개월의 어음을 쓴다면 석달동안 300만원의 자금융통을 할 수있게 된다. 하지만 4개월부터는 똑같은 100만원의 결제액이 들어오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은행수수료만 더 들어갈 뿐이다. 구매처에서는 이왕이면 현금결제를 원하는 것은 당연하다. 난 매달 세금계산서가 들어오는 대로 현금 결제하였다. 한번 거래하기 시작한 곳은 잘 바꾸지 않는다. 그대신 거래를 시작할 시점에 많은 고민을 하였다. 예를 들면 양말에 들어가는 원부자재중에 ‘스판’이 있다. 처음 양말을 만들때는 스판이 거의 들어가지 않았다. 지금도 대부분의 양말들은 스판을 많이 넣지 않는다. 비싸고 제작방법이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양말을 만들면서 외국에서 이런 저런 불만이 접수되기 시작하면서 품질이 문제가 되기 시작하였다. 우선 문제가 된 것이 모양을 좀 더 예쁘게 만들고 수명을 오래가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스판을 넣지 않고 만들면 조금만 써도 양말이 늘어지면서 모양이 처질 뿐만 아니라, 양말의 조직이 늘어져서 흐물흐물하게 된다. 그래서 스판을 쓰기로 하였다. 스판은 나일론스판과 폴리스판이 있는 데 나일론스판이 더 가격이 비싸다. 하지만 나일론스판의 탄력성과 수명이 더 길다. 그러면서 우리는 어느 공장의 스판을 쓰는 가의 고민을 하였다. 당시에도 서너곳의 제품을 비교하면서 만들어 보았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한 곳의 스판이 우리 기계에 가장 적합한 것으로 나타났다. 사실 이 부분은 남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다른 양말공장들은 수시로 거래처를 바꾸면서 스판은 다 같은 스판이지 뭐가 다를 게 있냐고 나에게 묻는다. 그 때 결정된 스판공장과는 아직도 거래를 하고 있고, 다른 소재도 대부분은 같은 곳에서 공급을 받는다.



내가 원부자재 공급처를 가급적 바꾸려하지 않는 것은 일단 안정적인 품질을 유지할 수있다는 장점이 있다. 같은 곳에서 같은 제품을 받는 다는 것은 업무상의 여러 가지 위험을 많이 줄여준다. 뿐만 아니라 필맥스의 경우는 좀 까다롭다. 일반적인 경우로 보면 색상이 들어가있는 고무나 스판을 쓰는 양말생산업체는 거의 없다. 예를 들면 두가지 색이 들어간다면 고무와 스판은 그냥 투명스판을 쓴다. 하지만 필맥스는 들어가는 면사의 색깔마다 고무와 스판을 맞추어서 같이 편직을 한다. 생산 효율성이 낮고 비용이 더 들어간다. 그러니까 저렴한 가격에 될수록이면 많은 수량을 만들어서 그 수량에 따른 편직로를 받아야 하는 양말공장들로서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생산방식이지만 우리는 그렇게 만들어 왔다. 이런 생산방식은 우리에게 익숙해져야 하는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될수록이면 구매처의 사장님들을 자주 만나려고 했다. 그들로부터 듣는 정보 또한 매우 중요하다. 그들은 각 회사들을 영업차 많이 돌아다니기 때문에 완제품을 파는 곳보다 오히려 정보가 많다. 신체로 본다면 완제품 업체는 신체의 말단이라면 부품이나 소재업체들이야 말로 인체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는 핏줄인 셈이다. 그 들부터 듣는 새로운 실에 대한 정보, 새로운 편직방법에 대한 지식, 앞으로 동종업계의 전망이나 인맥이 그렇게 해서 넓어져왔다.



이렇게 거래처와의 관계가 무리없이 잘 흘러가던 기간이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나의 결제방식에 문제가 생겼다. 이전처럼 현금거래가 하기 어려워졌을 뿐만 아니라, 제 때에 갚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해졌다. 그런 시간이 길어지면서 구매처로부터 결제요청 전화를 받으면 정말 난감했다. 원부자재는 받아야겠는 데, 당장 지불할 돈은 없고. 그 때 나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전화가 내가 돈을 주던 사람들로부터 돈달라고 독촉하는 전화를 받을 때’임을 알았다. ‘갑’과 ‘을’의 관계가 전도되었다. 정말 받아서 별로 할말이 없었고, 내가 자존심을 상하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그들로부터 오는 전화를 피한 적은 없다. 바로 전화를 받지 못하였다면, 꼭 내가 다시 전화를 했다. 내가 들어야 할 내용과 할말이 어차피 정해져 있었지만 피해봐야 오히려 상처만 더 빨리 심해지게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게다가 난 수중에 돈은 없지만 ‘사정’을 해서라도 물건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이들이 나의 관계를 완전히 바꾸어서 ‘현금결제’를 요구하며 공급을 거절하면 난 그야말로 까마득한 낭떠러지로 떨어져야 한다. 하지만 다행이도 아직까지 그들과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비록 물건을 받고, 양말을 만들고, 수출을 한 다음에 결제하는 등의 완전치 못한 결제에도 불구하고 주문이 왔을 때 원부자재를 받지 못해서 물건을 만들지 못한 적은 없다. 이제는 내가 오히려 그들과의 관계에서 도움을 받고 있는 ‘을’이 되었어도 그들은 여전히 나를 믿어준다. 그리고 나도 돈이 생기면 어디보다 우선해서 원부자재 공급업체에, 나의 거래선들에 지급을 먼저했다. 설령 은행에 지불을 늦추는 한 있더라도. 은행과의 거래도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 곳은 언제든지 돈으로 해결할 수있다. 하지만 업계의 평판이라는 것은 돈으로 해결할 수없다. 그리고 일단 평판이 나빠지면 업계에서 다시 회복할 수가 없다.



내가 판매를 하러 영업을 다니는 곳보다 나에게 물건을 팔러고 하는 사람들을 더 자주 만나려고 한다. 구매처 사람들은 내가 있는 현재의 업계 뿐만 아니라 인근 업계에도 돌아다닌다. 그들이 나에 대해 내리는 평가는 한국 산업사회에서 나에게 내리는 평가나 마찬가지이다. 게다가 소문도 빨리나는 게 그들을 통해서이다.



상황이 안 좋아졌을 때 ‘내가 돈을 주던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 가?’가 내 인생에 대한 평가이기도 하고, 나를 가장 괴롭히는 일이 되는 것을 여러번 보았기 때문에, 난 나의 구매파트너들과 더 가까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