닮은듯 서로 다른 서울 북한산과 칭다오 라오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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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북한산을 오르며 여름휴가 때 짬을 내 다녀온 중국 라오산(노산)을 떠올렸다.
마음 내키면 언제든 전철이나 버스를 타고 접근할 수 있는 산, 서울엔 그런 산들이 많다.
남산, 인왕산, 북악산, 아차산, 관악산, 청계산, 그리고 북한산까지.
멀리 가지 않고도, 바로 가까이에 이처럼 산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그 중에서도 암릉 걷는 재미가 쏠쏠한 북한산은 서울 어느 방향에서 접근해도
산들머리를 만날 수 있어 좋다.
사통팔달 등로는 각자 체력에 따라 길게 또는 짧게 선택할 수도 있다.
이처럼 서울의 진산, 북한산은 서울의 허파이자 건강지킴이로 늘 우리 곁에 있다.
북한산이 서울의 진산이듯 중국 칭다오에는 노산이 있다.
‘태산이 높다해도 노산만은 못하다’ 할 정도로 수려한 노산의 산세는 기품이 있다.
중국사람들은 칭다오를 일러, ‘홍와녹수남천벽해(紅瓦綠水藍天碧海)’
즉 ‘붉은 지붕과 녹색 숲, 쪽빛 하늘 그리고 푸른 바다를 품은 도시’라 부른다.
칭다오 시내에서 동쪽으로 4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노산은 산동반도의 주요산맥이다.
노산의 여러 봉우리 중, ‘巨峰’은 해발 1,132m로 대륙 해안에선 최고봉이다.
해안선을 따라 이어진 능선은 기이한 모양의 바위와 깎아지른 듯한 암벽으로 이뤄져 있어
중국사람들은 노산을 일러 ‘해상제일명산’이라 부른다. 가히 손색없다.
우리의 북한산 만큼이나 트레킹코스도 다양하다.
그만큼 중국사람들이 즐겨찾는 산이다. 칭다오 도심을 벗어나자, 이내 차창 밖으로 근육질의 산능선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리상 서울과 가장 가까운 중국 명산이라 그런지 북한산의 산세와 퍽이나 닮았다.
북한산이 서울을 품고 있다면 노산은 칭다오를 감싸 안았다. 이 역시 닮은 꼴이다.
해안도로를 달려 노산 들머리 가까이에 이르자, 모자를 눌러 쓴 청년이 차를 막아 세웠다.
동행한 지인이 차에서 내려 이유를 물었다.
“여기서부터는 차를 몰고 입구까지 갈 수 없다.
주차장으로 되돌아가 차를 세워두고 버스를 이용하라”고 했다,
그가 말한 공동주차장이란 곳은 족히 10km는 되돌아 가야 한다.
지인이 난감해 하는 표정을 짓자, 그 청년은
“그렇다면 저기 보이는 상점(중국茶 판매점)으로 가서 안내를 받으라”며
도로 저 편을 손으로 가리켰다.
마뜩잖게 상점으로 들어간 지인이 수분 뒤 벌레 씹은 표정으로 나왔다.
“타고 온 차를 상점에 맡겨두고 각 100위엔씩 5명이니 500위엔을 내면
자기네 차로 입구까지 데려다 주겠다”는 것이다.
통행을 제지하는 측과 상점 주인 간 모종의 뒷거래가 있는듯 낌새가 아리송해 보였다.
결국 우리는 상점 주인의 제의를 묵살하고 왔던 길로 차를 돌렸다.
되돌아 나오는 길에 ‘석노인관광원’이란 곳에 차를 세웠다.
이곳은 노산의 변방쯤 돼 보였다.
어차피 이번엔 노산을 살짝 ‘간’만 볼 요량으로 가볍게 찾은 터였다.
오로지 노산 종주만을 위해 다시찾고 싶을만큼 매력적인 산임에는 틀림없다. 20위엔의 산 입장료를 내고서 산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기대했던 노산에 대한 환상이 조금씩 금가기 시작했다.
골격은 북한산을 닮았으나 숲 속 느낌은 완전 딴 판이다. 우선 시끄럽다. 놀이공원 분위기다. 복장 역시 생뚱맞다.
구두를 신고서 바짓단은 말아올리고 웃통은 벗은 채 산을 오르는 男,
블라우스 차림에 슬리퍼를 신고, 미니스커트에 하이힐을 신은 女,
안전을 위한 최소한의 복장이라도 갖춘 산객은 찾아보기 힘들고 평상복 차림에
생수통 하나 달랑 든게 전부다.
뭐 이것까진 문화적 차이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기껏 해발 1천미터 남짓 산을 오르면서 히말라야 원정에나 어울릴 고가 장비나
첨단 기능의 아웃도어로 치장한 한국 산객들의 복장을 어처구니 없어하는
시각도 분명 존재하니 말이다.
문제는 공공 개념이, 희박한 것을 넘어 실종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산중턱 전망대 정자에 이르는 동안 숲길은 온통 쓰레기 천지였다.
플라스틱 물병과 음식 비닐봉지, 그리고 쓰고버린 화장지까지… 걷는 내내 궁금했다.
공공에 대한 의식수준이 어떻길래, 입장료는 받아서 무얼 하길래 이 지경일까?
산중턱 정자에 앉아 노산 줄기와 해안을 굽어보며 땀을 훔치고 있는데
이번엔 어디선가 고약한 냄새가 진동했다. 정자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여기저기 큰 일(?)을 본 흔적들이 눈에 들어왔다.
뒤처리 한 휴지도 흉하게 나뒹군다. 중국 정부는 지난 북경 올림픽을 앞두고
‘문명 10대 개조’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벌인 바 있다.
‘아무데서나 떠들지 말자’, ‘아무데나 침뱉지 말자’, ‘웃통 벗고 다니지 말자’ 등등…
그러나 그새 약발이 가셨나? 아니면 ‘~말자’가 ‘~하자’로 바뀌었나?
멀찌감치에서 본 기품 있는 노산의 위용은 숲 속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노산의 흉한 속살이 안스럽고 ‘해상제일명산’이란 말이 무색할 뿐이다.
눈맛을 잃어서일까, 노산을 내려오면서 불현듯 북한산 능선길이 그리웠다.
우리의 산 속엔 염치가 있고 배려와 예의가 있어 천만다행이란 생각에…
마음 내키면 언제든 전철이나 버스를 타고 접근할 수 있는 산, 서울엔 그런 산들이 많다.
남산, 인왕산, 북악산, 아차산, 관악산, 청계산, 그리고 북한산까지.
멀리 가지 않고도, 바로 가까이에 이처럼 산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그 중에서도 암릉 걷는 재미가 쏠쏠한 북한산은 서울 어느 방향에서 접근해도
산들머리를 만날 수 있어 좋다.
사통팔달 등로는 각자 체력에 따라 길게 또는 짧게 선택할 수도 있다.
이처럼 서울의 진산, 북한산은 서울의 허파이자 건강지킴이로 늘 우리 곁에 있다.
북한산이 서울의 진산이듯 중국 칭다오에는 노산이 있다.
‘태산이 높다해도 노산만은 못하다’ 할 정도로 수려한 노산의 산세는 기품이 있다.
중국사람들은 칭다오를 일러, ‘홍와녹수남천벽해(紅瓦綠水藍天碧海)’
즉 ‘붉은 지붕과 녹색 숲, 쪽빛 하늘 그리고 푸른 바다를 품은 도시’라 부른다.
칭다오 시내에서 동쪽으로 4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노산은 산동반도의 주요산맥이다.
노산의 여러 봉우리 중, ‘巨峰’은 해발 1,132m로 대륙 해안에선 최고봉이다.
해안선을 따라 이어진 능선은 기이한 모양의 바위와 깎아지른 듯한 암벽으로 이뤄져 있어
중국사람들은 노산을 일러 ‘해상제일명산’이라 부른다. 가히 손색없다.
우리의 북한산 만큼이나 트레킹코스도 다양하다.
그만큼 중국사람들이 즐겨찾는 산이다. 칭다오 도심을 벗어나자, 이내 차창 밖으로 근육질의 산능선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리상 서울과 가장 가까운 중국 명산이라 그런지 북한산의 산세와 퍽이나 닮았다.
북한산이 서울을 품고 있다면 노산은 칭다오를 감싸 안았다. 이 역시 닮은 꼴이다.
해안도로를 달려 노산 들머리 가까이에 이르자, 모자를 눌러 쓴 청년이 차를 막아 세웠다.
동행한 지인이 차에서 내려 이유를 물었다.
“여기서부터는 차를 몰고 입구까지 갈 수 없다.
주차장으로 되돌아가 차를 세워두고 버스를 이용하라”고 했다,
그가 말한 공동주차장이란 곳은 족히 10km는 되돌아 가야 한다.
지인이 난감해 하는 표정을 짓자, 그 청년은
“그렇다면 저기 보이는 상점(중국茶 판매점)으로 가서 안내를 받으라”며
도로 저 편을 손으로 가리켰다.
마뜩잖게 상점으로 들어간 지인이 수분 뒤 벌레 씹은 표정으로 나왔다.
“타고 온 차를 상점에 맡겨두고 각 100위엔씩 5명이니 500위엔을 내면
자기네 차로 입구까지 데려다 주겠다”는 것이다.
통행을 제지하는 측과 상점 주인 간 모종의 뒷거래가 있는듯 낌새가 아리송해 보였다.
결국 우리는 상점 주인의 제의를 묵살하고 왔던 길로 차를 돌렸다.
되돌아 나오는 길에 ‘석노인관광원’이란 곳에 차를 세웠다.
이곳은 노산의 변방쯤 돼 보였다.
어차피 이번엔 노산을 살짝 ‘간’만 볼 요량으로 가볍게 찾은 터였다.
오로지 노산 종주만을 위해 다시찾고 싶을만큼 매력적인 산임에는 틀림없다. 20위엔의 산 입장료를 내고서 산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기대했던 노산에 대한 환상이 조금씩 금가기 시작했다.
골격은 북한산을 닮았으나 숲 속 느낌은 완전 딴 판이다. 우선 시끄럽다. 놀이공원 분위기다. 복장 역시 생뚱맞다.
구두를 신고서 바짓단은 말아올리고 웃통은 벗은 채 산을 오르는 男,
블라우스 차림에 슬리퍼를 신고, 미니스커트에 하이힐을 신은 女,
안전을 위한 최소한의 복장이라도 갖춘 산객은 찾아보기 힘들고 평상복 차림에
생수통 하나 달랑 든게 전부다.
뭐 이것까진 문화적 차이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기껏 해발 1천미터 남짓 산을 오르면서 히말라야 원정에나 어울릴 고가 장비나
첨단 기능의 아웃도어로 치장한 한국 산객들의 복장을 어처구니 없어하는
시각도 분명 존재하니 말이다.
문제는 공공 개념이, 희박한 것을 넘어 실종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산중턱 전망대 정자에 이르는 동안 숲길은 온통 쓰레기 천지였다.
플라스틱 물병과 음식 비닐봉지, 그리고 쓰고버린 화장지까지… 걷는 내내 궁금했다.
공공에 대한 의식수준이 어떻길래, 입장료는 받아서 무얼 하길래 이 지경일까?
산중턱 정자에 앉아 노산 줄기와 해안을 굽어보며 땀을 훔치고 있는데
이번엔 어디선가 고약한 냄새가 진동했다. 정자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여기저기 큰 일(?)을 본 흔적들이 눈에 들어왔다.
뒤처리 한 휴지도 흉하게 나뒹군다. 중국 정부는 지난 북경 올림픽을 앞두고
‘문명 10대 개조’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벌인 바 있다.
‘아무데서나 떠들지 말자’, ‘아무데나 침뱉지 말자’, ‘웃통 벗고 다니지 말자’ 등등…
그러나 그새 약발이 가셨나? 아니면 ‘~말자’가 ‘~하자’로 바뀌었나?
멀찌감치에서 본 기품 있는 노산의 위용은 숲 속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노산의 흉한 속살이 안스럽고 ‘해상제일명산’이란 말이 무색할 뿐이다.
눈맛을 잃어서일까, 노산을 내려오면서 불현듯 북한산 능선길이 그리웠다.
우리의 산 속엔 염치가 있고 배려와 예의가 있어 천만다행이란 생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