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주역읽기



필자는 주역이 우주와 인생의 철리를 모두 담고 있다고 말할 자신은 없다. 다만 64괘 384효에 담겨있는 내용은 그렇게 어렵고 복잡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경건하고도 솔직한 감정과, 변화를 -때로 인간으로 알 수 없는 위력을 드러내보이는- 극복해가는 자연인의 지혜와 용기가 원시적이고 생동적인 비유속에 담겨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역경(易經)에서 역전(易傳)으로 그리고 주석(注釋)으로 발전해가는 역학사에는 이런 진솔한 경험들이 금수와 어울려 살던 상고시대로부터 변론되어 가는 과정이 아로새겨져있다. 마치 단층을 보고 각 지층에 담긴 지구의 역사를 추정하듯이, 이를 통해서 인간의 지성과 문명의 역사를 읽을 수 있다.



주역을 마주할 때는 나의 운명을 알아야겠다든지 국가의 장래나 인류가 나아갈 방향을 예시받기 위해서라는 심각한 주제의식에서 읽기보다는, 옛 사람들의 삶의 모습과 사유방식을 알아본다는 비교적 가벼운 주제에서부터 읽어보기를 바란다. 지나친 부담감은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몸과 마음이 경직되는 법이다.



필자는 주역의 성격에 대해 일단 고대시기 인간의 자연속에서의 삶과 사회속에서의 삶을 기록한 역사서라고 보고 싶다.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주역은 정치적으로 은(殷)주(周)시기 사회적 모순의 발생에서 주왕(紂王)과 문왕(文王)이 갈등하면서 풍전등화같은 혁명의 위태로움을 겪어 점진적인 사회개혁으로 마무리되는 과정이 전편에 걸쳐 쓰여 있다. 그런데 주역에 대한 거창한 선입관들을 괄호쳐놓고, 당시의 삶의 기록을 미시적으로 분석해보면 재미있는 면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관점을 조금만 달리하면 천문기상이나 일식이나 지진에 대한 놀라움과 그 진행과정 그리고 인간의 대처과정에 대한 기록도 보인다. 동물의 생태와 습성에 대한 치밀한 관찰도 있다.



가령 주역의 마지막 괘인 미제(未濟)괘는 건너가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를 “작은 여우가 꼬리를 적셨다”는 말로 비유하고 있다. 이 비유로부터, 개나 여우 종류등의 꼬리를 가진 개과 동물들은 꼬리를 내리면 기세가 꺾였음을 의미하고, 꼬리를 강물에 적신 여우는 강을 건너지 못함을 의미하며, 그 이유는 아직 어린 여우이기 때문이라는 추리가 가능해진다. 또 한낮에 별을 보았다는 언급이 풍(豊)괘에 보인다. 한낮에 별을 보았다는 것은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오직 개기일식의 경우에서나 발생할 수 있는 일이다. 아마 원시인들을 갑자기 천지가 칠흙같이 어두어지는 개기일식에 두려워떨었을 것이다. 그래서 풍괘의 효사에 3번이나 한낮에 별을 보았다는 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또 괘사에는 ‘근심하지 말라’는 말도 남겼다. 개기일식은 오래 지속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주역속에는 소와 양을 길들이고 활과 그물을 만들고 배와 수레를 만들며 시장을 만드는 문명화의 과정이 나온다. 또한 오늘날과도 별차이가 없어보이는 남녀간의 애정문제나 혼인제도, 정치 및 행정제도, 국가제도, 학교․복식․음식․형벌․전쟁 등의 사회제도에 관한 내용도 있다. 또 귀신이나 도적, 변방의 이민족 등의 제도권밖에 관한 내용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주역의 괘효사가 언급하고 있는 내용들중 많은 부분에서 인간의 감정, 예를 들면 남녀간의 감정이나 재물에 대한 욕망 등 인간의 감정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있으며 이런 감정으로 인해 심각한 사회적 갈등이 야기됨을 말해주고 있다. 유치하게 보이는 혹은 이런 미묘한 감정의 문제가 인간 삶의 본질적 문제인지도 모른다. 주역은 이런 부분에 대해서도 도덕적 교훈이나 미사려구로 변명하지 않고 대담하고도 솔직하게 다룬다. 그래서 힘이 넘친다.



이런 작은 부분들에서부터 하나씩 하나씩 읽어가본다면 어느덧 주역의 대담한 매력에 빠져들 것이고, 그속에서 주역을 이해하는 한적한 소롯길도 열릴 것이다. 다만 여기에는 지금의 현대라는 시각을 벗어나고 주역에 대한 선입관을 벗어버려야 한다. 원시로 돌아가 그들의 삶 속에 같이 동참하는 원시적 상상력과 본능적 추리력을 발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