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부끄럽다
슬플 때 석양을 바라본다는
소혹성 612호 어린왕자는
어느 날엔 44번이나 석양을 보았다

왜 장미에 가시가 있는지를 가지고 고민을 하고
자기별에 두고온 단 한 송이 그 심술쟁이 장미를 그리워하는 어린왕자에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별에 술 마시는 사람들이 나온다
<아저씨! 아저씨는 왜 술을 마셔요?>
<응! 부끄러워서 술 마셔>
<무엇이 부끄러워요?>
< 응! 술 마시는 게 부끄러워>

나는 내 방에 혼자 <쿡!> 하면서
지금 컴 앞에서 술을 마신다
술집 나갈 돈도 없고 같이 마실 친구도 없고
사람들 보기에도 부끄러워 홀로 술을 마신다

화면 술병의 151 이라는 수자는 둘로 나누면 75이다
지금 마시는 술은 럼주로써 푸에르토리코 산 <바카르디> 라는
75도짜리 양주이다
내가 알고 마셔본 술 중 제일 독한 놈이다

독한 싸구려 양주(마트에서 2만 몇천원이다) 를 마시는 나는
결코 독한 놈이 되지 못하는 삼류시인이다
이슬 한두병에 내 영혼을 팔아먹고 히죽히죽 웃고 다니는….

어중띠게 나이를 먹은 것도 미안하고
젊은이들 축에도 끼지 못하고 그렇다고 늙은이축에는 엄두도 못내고
이래저래 갈곳이 없고 색깔이 없고 주장이 없고 지조가 없는 회색분자가 되어가는 ……

전교조가 가두서명을 벌이던 20년 전쯤 종로 어디에서인가 거리에서
<나는 당신들 중 한명만이 남더라도 당신들을 지지합니다> 라고 쓰던 나는
그저 말 그대로 전교조의 말이 100% 다 진리이며 그 반대는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무엇이던가
술 한잔 홀짝홀짝거리며 지금은 전교조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때 거리에서 내가 서명했던 원본을 <찾아서 지웠으면 소원이겠네>

무엇이 변했는가
나? 전교조? 세상? 인심? 여론? 사조? 시대정신? 분위기? 소속? 아니다 아니다
나 그저 부끄럽게 조금 늙었을 뿐이다

나와 다른 놈은 죽여야 하고 웬수이고 내 주적이 되는 이 세상에서
말 그대로라면 독야청청하고 너무 깨끗하고 살기 좋은 개혁세상을 만들려다가
거부당하고 배신당하고 의심을 받아 말로만
친구들을 남기고 홀로 죽음을 택한 불쌍한 정치인을 보면서
과연 내가 어느 편에 서야 줄을 제대로 서는 것인가???? 잠시 어리둥절하다가
새삼 현실과 이상의 격차를 실감하며 내 스스로 부끄럽기 한이없다

나는 게편도 이니고 가재편도 아니다
그런 나는 요즘 양쪽 세상에서 모두 비겁자, 그리고 회색분자로 통한다
한잔 술 낮술 막술 그리고 혼자술에 취해 말한다
그래 나는 회색이련다 너는 까망하든지 하양하거라

어제 밤 9시쯤 병신들글쓰는모임 창립총회에 참석했다가 술이 덜 취해 제자랑 모두 넷이
가게에서 맥주를 사다가 대방역 앞 길 가 작은 정자에서 술을 마셨다
사방 막힌 데라고는 한곳도 없는 네 사람이 자유주제로 한 두시간 밤거리 토론을 하였다
거기서 내가 말한 주 주제는 단 하나 이거였다

난 내가 제일 미워하는 전직대통령인 전두환 전대통령이 오히려 덜 부담스럽다
비록 내가 투표는 하지 않았어도 말없이 그분을 믿고 의지하고 기대하고 기다렸는데
대통령 그만두었다고 사람들이 의심한다고 내편이 없다고 또 누가 뭐란다고 또 *** 또 ** 그런다고
달랑 스스로 목숨을 끊은 그 분을 내가 한때 조국의 대통령으로 기대했다는 것이 부끄럽다

내가 사는 역사 동안 나는 <전직대통령을 죽인 국민들이 사는 국가의 국민>라는 꼬리가 달린다
차라리 암살이었다면 얼마나 숭고하고 위대하랴
장세동 같은 부하가 없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정말 나는 깨끗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리고 정말 뭐라고 떠드는 그 사건들 그게 뭐 대수이랴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그 분의 대통령 직분 수행업적을 평가할 자격이 없다
그 분은 그 분 대로 훌륭했다
다 그 시대에 꼭 필요한 일들을 추진하였고 그리고 뒷날 역사가 평가할 것이다

나는 부끄럽다
전직대통령이 자살이라는 방법으로 목숨을 끊었는데도
나는 조문도 하지 못했고 조기표시도 못했고 조문글도 몰리지 못했다
그러기 이전에 나는 너무나도 황당하고 화가 났고 슬펐고 답답했다
단 하나 < 누구를 위하여 죽었느냐> 달랑 이 하나를 풀지 못해 나날을 고민으로 보냈다

나는 부끄럽다
내가 원하지는 않았지만 나라의 기둥이셨던 분을 그렇게 비참하게 보내드린 것에
내 한 역할 작은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이 부끄럽다
충분히 역할을 할 수 있었던 분들이 역할을 못하고 그냥 그렇게 보냈던 것들이 부끄럽다
<있을 때 잘 해>라는 유행가 가사처럼 있을 때 더 잘 해드리지 못하고
돌아가신 후 땅을 치며 애통하며 또다른 끄나불로 바투 잡는 사람들을 볼 때 더 부끄럽다

한잔 한잔 취기가 오르며 나는 더 부끄럽다
내 나이 60을 바라보며 이제 무얼 더 바라고 기대한다고
이제 무엇을 더 잃지 않으려 아둥바둥 한다고
어느 편에서도 배척을 받지 않고 살려고 이러느냐
그러면서 내가 나서지 못하는 이유를 핑계꺼리로라도 밝히고 싶다

애국애국 국민국민 하면서
자기들 당을 위하여 허리를 굽실거리는 정치인들
영정조시대가 무색할 정도로 정파싸움만 하는 정치인들
어떻하든지 꼬투리 하나 잡으면 살판 났다고 기고만장하는 정치인들
정말 교과서에서 배운 애국하는 사람들이 부러운 세상이다
지금 과연 누가 우리 정치인들을 기대하랴
부끄럽다/ 정말 부끄럽다/ 챙피하다

그런 정치라면 유치원생들도 하겠다
나라가 부끄럽다
온 국민이 부끄럽다
그래도 정치인들은 역시 얼굴이 두껍다
나는 대한민국의 정치인들이 부끄럽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술을 마신다

독한 놈만이 독한 술을 마실 자격이 있다
독한 놈만이 독한 사랑을 할 자격이 있다
독한 국민만이 독한 지도자를 만날 자격이 있다
독한 술을 마시며 나는 나를 더 독하게 만들기 위히여
오늘 비수의 칼날을 간다

다운증후군 모리배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도
촛불 들고 불장난을 하는 애들 세상에서도
나는 비겁하게 아무 편도 들지 못하고 가슴만 태우는
소시민으로 지내면서 내 스스로 꿈과 욕망과 자만을 끊을
비수의 칼날을 간다

혼자 해롱해롱 하며
이제 마지막 말을 해야겠다
정말 나는 부끄럽다
맹정신에는 아무말도 못하면서
술기운을 빌어 우물 안에서 큰소리 한번 쳐 보고
씨익 웃으면서 내일에는 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헤헤 거릴 내가 정말 부끄럽다

정말이지 나는 내가 너무 부끄러워 살 수가 없다
챙피하다
그래도 나는 살아야 한다
살자 살자 살자 죽지 말자 자살하지 말자
살자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