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키즘을 독립운동 사상으로…탄압 가능성 등 고려했을 것"
조선어 소설 '제방공사'는 난도질당한 채 실려
독립유공자이며 소설가로 알려진 이창신(1914∼1948)이 쓴 것으로 추정되는 시(詩)가 발견됐다.

일본 출판사인 토요미술사출판판매는 시 전문 월간지 '시와 사상'(詩と思想) 3월호에 작성자가 '이석성'(李石城)으로 돼 있는 일본어 시 '우리들의 선구자 말라테스타를 애도한다' 전문을 게재한 것으로 1일 확인됐다.

이석성은 이창신이 1934년 신동아에 '제방공사'(堤防工事)라는 소설을 실을 때 사용한 필명이다.

'제방공사' 외에 이석성 이름으로 된 문학 작품이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창신의 아들 이명한(89) 광주전남작가회의 고문이 유품 속에서 찾은 육필 원고 사본을 작년 8월 김정훈 전남과학대 교수에게 전달해 연구·분석하도록 한 것을 계기로 이번에 시가 공개됐다.

'우리들의 선구자 말라테스타를 애도한다'는 이탈리아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에리코 말라테스타(1853∼1932)의 죽음(1932년 7월)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시는 "철과 같은 의지의 인간! 열정을 불태우던 사내는 / 지금 목숨이 끊어져 / 로마의 한구석에 오랫동안 누워있다"며 말라테스타의 죽음을 묘사했다.

시 속 화자는 "아아! / 『말라여! 철의 사나이여!』/ 동지의 가슴에 타오르는 / 고귀한 이상은 어찌하여 /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걷는가 / 나 지금 동지의 죽음과 함께 / 굳은 신념 더욱 강해져 / 자유를 위해 행복을 위해 / 목숨을 바치리라 맹세한다…"고 투쟁의 의지를 밝힌다.

이어 "그대들은… / 말라테스타의 장렬한 죽음의 길을 뒤따라 / 일어서자! / 자유 코뮌 건설을 위해― / 자유·평등·박애의 수호를 위해― / 그리고 안락한 사회…만인의 행복이 성취될 그 날을 맞자!"고 "열렬한 의지를 품은 전 세계의 동지들"을 향해 호소했다.

김 교수는 이창신이 말라테스타 사망 한 달 후에 쓴 이 시로 조국 독립에 대한 바람을 표출했다고 분석했다.

그는 이창신이 말라테스타를 '자유 평등한 사랑의 명성(明星, 밝은 별)'으로 규정했는데 이는 조선 독립의 메타포(간접적·암시적으로 나타내는 것)적인 표현이라며 "형식상 말라테스트의 죽음을 애도한 것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조선 독립에 대한 열망을 비유적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김 교수는 이창신이 나주농업보습학교 재학 시절 광주학생운동이 발발·확대하자 "나주지역 신간회와 협조해 나주지역 학생들의 선두에 서서 나주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면서 그가 신채호(1880∼1936)처럼 아나키즘 사상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며 이같이 해석했다.

시와 사상에 함께 실린 이 고문의 글에서 이창신의 사상적 경향을 엿볼 수 있다.

그는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폿킨(1842∼1921),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바쿠닌(1814∼1876) 등 러시아 아나키스트의 저서 일본어판과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 1871∼1911), 오스기 사카에(大杉榮, 1885∼1923)와 같은 일본 무정부주의자 및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인 가와카미 하지메(川上肇, 1978∼1946) 등의 서적이 집에 쌓여 있었다고 부친의 독서 이력을 설명했다.

이창신이 일본어로 시를 쓴 이유에 관해 김 교수는 "일본어 교육을 받았고, 일본어 사상서를 탐독했다"며 "작자의 입장에서는 조선어보다 일본어로 쓰는 게 더 비유적일 수도 있었을 것이고 (조선어로 썼을 때) 탄압받을 가능성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고 추정했다.

'우리들의 선구자 말라테스타를 애도한다'를 쓴 후 2년가량 지나 신동아에 실린 소설 '제방공사'는 조선어 작품이지만 글자를 식별하기 어렵게 하는 복자(伏字) 처리로 난도질당했다.

실제로 김 교수가 이번 연구를 위해 전남대 도서관에서 확인한 신동아 1934년 12월호 사진을 보면 '제방공사'의 본문은 알아보기 어려운 상태였다.

김 교수는 조선 독립을 추구했던 이들이 당시 일본의 반체제 세력과 사상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맺었을 가능성에도 주목했다.

그는 "신채호 등 당시 국내의 독립운동가들은 아나키즘 사상을 독립운동의 사상적 이론으로 일본에서 받아들였다.

일본 혁신 세력에게서 제국주의 극복의 이론을 받아들인 셈"이라고 시대적 배경을 부연했다.

시와 사상은 '우리들의 선구자 말라테스타를 애도한다' 연구 경위에 관한 김 교수의 기고문도 함께 실었다.

시와 사상 4월호와 5월호에는 이 작품을 분석한 김 교수의 논문이 실린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