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만 더 일찍 오시지"…100세 강제동원 피해자 가족의 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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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격 충격에 청력 잃어…피해 구술사업 시작됐으나 고령에 어려움
"지금이라도 시작해서 다행"…생존 피해자 2천400명으로 급감 "조금만 더 일찍 오시지. 왜 이렇게 늦었어요.
"
100살의 노인은 하고 싶은 말이 많은지 쉴새 없이 말했다.
묻는 말에 대답하라는 아내의 성화에는 "가만있어봐"라며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그러나 웅얼거리는 듯한 발음 탓에 그의 말은 되묻고 다시 물어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간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가 나오기도 했으나 문장으로 연결되지는 못했다.
청력 상실로 질문도 전혀 듣지 못했다.
◇ "억울하다"만 반복한 피해자…포격 충격에 청력 잃어
3·1절을 앞두고 지난 25일 인천시 남동구 자택에서 만난 이양용(100)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인 1944년 4월 일본 효고현(兵庫縣) 가와사키(川崎) 조선소로 강제동원됐던 피해자다.
이날 연합뉴스는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의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구술채록' 사업을 추진하는 민족문제연구소, 이상의 인천대 초빙교수와 동행해 이씨의 말을 들었다.
이 교수는 옛 일본의 모습이 담긴 사진도 보여주면서 1시간 30분가량 대화를 이끌어갔으나 강제동원 당시의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이씨의 설명은 결국 듣지 못했다.
동석한 이씨의 아내 조정숙(96)씨와 딸은 "조금만 더 일찍 오시지"라거나 "말하는 것을 녹음해놨어야 했는데"라며 아쉬워했다.
6남매 중 막내인 이씨는 고향인 충남 태안의 삭선리 마을에서 유일한 강제동원 대상이었다고 한다.
이씨는 평소 가족들에게 "억울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1921년생인 그는 머슴 생활을 하던 중 22살이 되던 해에 강제동원됐다.
이상의 교수는 "할아버지의 사례를 보면 강제동원의 계급성이 나타나는 측면이 있다"며 "지역에서 강제동원 인원을 정하면 가장 어려운 사람이 대상이 됐다"고 설명했다.
조씨는 '처녀 공출'을 피하려고 17살이 되던 해에 결혼하기로 하고 이씨 집에서 사주단자까지 받았으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남편을 일본으로 떠나보내야만 했다.
이씨와 관련된 자료를 취합해보면 그는 담뱃값 정도를 받고 하루 12시간을 조선소에서 파이프의 손상된 곳에 표시하거나 물품을 나르는 등 일을 했다고 한다.
이씨는 이날 어렵사리 "숙소는 다다미방이었는데 줄줄이 노무자들이 이어서 잤다"며 "담요 1장을 줬다"는 취지로 증언했다.
조씨는 일본에서 포격을 경험하고 1945년 8월께 돌아온 남편이 환청을 들어서 "밖에서 '탕탕'하는 소리가 난다"며 한밤중 자주 집 밖으로 나갔다고 기억했다.
그때의 충격 탓인지 이씨는 청력이 나빠져 지금은 말소리를 듣지 못하고 말할 때도 발음이 완벽하지 않았다.
이씨의 딸은 "아버지께서 평소 징용됐을 때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지금보다는 말씀을 잘하실 때 조금만 더 일찍 오셨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 "지금이라도 구술 채록해서 다행"…앞으로 5년간 진행
전문가들은 더 늦기 전에 지금이라도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구술 채록 사업이 진행되는 것이 다행이라고 평가했다.
여전히 생존 피해자 가운데 그때의 참상을 생생하게 증언할 수 있는 사람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지난 23일 구술 채록 사업의 첫 대상자인 미추홀구 주안동에 사는 서병덕(102) 할아버지는 비교적 당시 상황을 잘 설명했다고 한다.
질문을 제대로 듣지는 못했으나 그의 증언 내용은 대부분 이해할 수 있어 그때의 모습을 비교적 상세히 들을 수 있었다.
서씨는 이른바 '이중 동원' 피해자로 일본 후쿠시마(福島) 탄광에 1940년 10월부터 1944년 8월까지 동원됐다.
이후 일본군의 입영 영장이 나왔다며 집으로 가라고 해 충북 충주의 자택에서 하룻밤을 자고 서울 용산훈련소로 갔다.
3개월간 훈련을 받은 뒤 다시 하얼빈으로 동원됐다.
탄광에 강제동원 됐을 때는 이른바 지하 '막장'에서 석탄을 캐거나 다이너마이트로 터뜨린 탄을 옮기는 일을 했다.
오랫동안 채굴이 이뤄진 탄광은 '승강기'와 유사한 기구를 두 번 갈아타서 내려가야 할 정도로 깊어 위험했다.
군인으로 재차 동원됐다가 해방된 뒤 그는 하얼빈에서 47일간 걸어서 동두천까지 왔다고 한다.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은 이씨와 서씨에 이어 일단 올해 상반기 총 40시간 분량의 구술 채록 사업을 진행할 예정이다.
일단 10명으로 계획했으나 시간 조정에 따라 대상자가 15명 정도로 늘어날 가능성도 있다.
재단은 올해에 그치지 않고 앞으로 5년 이상 구술 채록 사업을 이어갈 계획이다.
국외로 강제동원된 피해자 200명 정도가 사업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재단 관계자는 "2015년 재단이 만들어진 뒤 계속해서 구술 채록을 하겠다고 사업을 올렸으나 예산 편성이 되지 않았다"며 "앞으로 희망하는 모든 사람이 증언할 때까지 사업을 이어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상의 교수는 28일 "시간이 지날수록 생존 피해자가 줄어들 뿐만 아니라 육체·정신적 기능이 떨어지기 때문에 예전 일을 전달하기 어렵다"며 "앞으로 조속히 구술 채록 사업이 진행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행정안전부 등에 따르면 국내에 생존하고 있는 일제 강제동원 생존피해자는 2016년 8천99명에서 지난해 2월 기준 3천140명, 이달 기준 2천400명으로 급속히 줄었다.
/연합뉴스
"지금이라도 시작해서 다행"…생존 피해자 2천400명으로 급감 "조금만 더 일찍 오시지. 왜 이렇게 늦었어요.
"
100살의 노인은 하고 싶은 말이 많은지 쉴새 없이 말했다.
묻는 말에 대답하라는 아내의 성화에는 "가만있어봐"라며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그러나 웅얼거리는 듯한 발음 탓에 그의 말은 되묻고 다시 물어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간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가 나오기도 했으나 문장으로 연결되지는 못했다.
청력 상실로 질문도 전혀 듣지 못했다.
◇ "억울하다"만 반복한 피해자…포격 충격에 청력 잃어
3·1절을 앞두고 지난 25일 인천시 남동구 자택에서 만난 이양용(100)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인 1944년 4월 일본 효고현(兵庫縣) 가와사키(川崎) 조선소로 강제동원됐던 피해자다.
이날 연합뉴스는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의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구술채록' 사업을 추진하는 민족문제연구소, 이상의 인천대 초빙교수와 동행해 이씨의 말을 들었다.
이 교수는 옛 일본의 모습이 담긴 사진도 보여주면서 1시간 30분가량 대화를 이끌어갔으나 강제동원 당시의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이씨의 설명은 결국 듣지 못했다.
동석한 이씨의 아내 조정숙(96)씨와 딸은 "조금만 더 일찍 오시지"라거나 "말하는 것을 녹음해놨어야 했는데"라며 아쉬워했다.
6남매 중 막내인 이씨는 고향인 충남 태안의 삭선리 마을에서 유일한 강제동원 대상이었다고 한다.
이씨는 평소 가족들에게 "억울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1921년생인 그는 머슴 생활을 하던 중 22살이 되던 해에 강제동원됐다.
이상의 교수는 "할아버지의 사례를 보면 강제동원의 계급성이 나타나는 측면이 있다"며 "지역에서 강제동원 인원을 정하면 가장 어려운 사람이 대상이 됐다"고 설명했다.
조씨는 '처녀 공출'을 피하려고 17살이 되던 해에 결혼하기로 하고 이씨 집에서 사주단자까지 받았으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남편을 일본으로 떠나보내야만 했다.
이씨와 관련된 자료를 취합해보면 그는 담뱃값 정도를 받고 하루 12시간을 조선소에서 파이프의 손상된 곳에 표시하거나 물품을 나르는 등 일을 했다고 한다.
이씨는 이날 어렵사리 "숙소는 다다미방이었는데 줄줄이 노무자들이 이어서 잤다"며 "담요 1장을 줬다"는 취지로 증언했다.
조씨는 일본에서 포격을 경험하고 1945년 8월께 돌아온 남편이 환청을 들어서 "밖에서 '탕탕'하는 소리가 난다"며 한밤중 자주 집 밖으로 나갔다고 기억했다.
그때의 충격 탓인지 이씨는 청력이 나빠져 지금은 말소리를 듣지 못하고 말할 때도 발음이 완벽하지 않았다.
이씨의 딸은 "아버지께서 평소 징용됐을 때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지금보다는 말씀을 잘하실 때 조금만 더 일찍 오셨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 "지금이라도 구술 채록해서 다행"…앞으로 5년간 진행
전문가들은 더 늦기 전에 지금이라도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구술 채록 사업이 진행되는 것이 다행이라고 평가했다.
여전히 생존 피해자 가운데 그때의 참상을 생생하게 증언할 수 있는 사람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지난 23일 구술 채록 사업의 첫 대상자인 미추홀구 주안동에 사는 서병덕(102) 할아버지는 비교적 당시 상황을 잘 설명했다고 한다.
질문을 제대로 듣지는 못했으나 그의 증언 내용은 대부분 이해할 수 있어 그때의 모습을 비교적 상세히 들을 수 있었다.
서씨는 이른바 '이중 동원' 피해자로 일본 후쿠시마(福島) 탄광에 1940년 10월부터 1944년 8월까지 동원됐다.
이후 일본군의 입영 영장이 나왔다며 집으로 가라고 해 충북 충주의 자택에서 하룻밤을 자고 서울 용산훈련소로 갔다.
3개월간 훈련을 받은 뒤 다시 하얼빈으로 동원됐다.
탄광에 강제동원 됐을 때는 이른바 지하 '막장'에서 석탄을 캐거나 다이너마이트로 터뜨린 탄을 옮기는 일을 했다.
오랫동안 채굴이 이뤄진 탄광은 '승강기'와 유사한 기구를 두 번 갈아타서 내려가야 할 정도로 깊어 위험했다.
군인으로 재차 동원됐다가 해방된 뒤 그는 하얼빈에서 47일간 걸어서 동두천까지 왔다고 한다.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은 이씨와 서씨에 이어 일단 올해 상반기 총 40시간 분량의 구술 채록 사업을 진행할 예정이다.
일단 10명으로 계획했으나 시간 조정에 따라 대상자가 15명 정도로 늘어날 가능성도 있다.
재단은 올해에 그치지 않고 앞으로 5년 이상 구술 채록 사업을 이어갈 계획이다.
국외로 강제동원된 피해자 200명 정도가 사업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재단 관계자는 "2015년 재단이 만들어진 뒤 계속해서 구술 채록을 하겠다고 사업을 올렸으나 예산 편성이 되지 않았다"며 "앞으로 희망하는 모든 사람이 증언할 때까지 사업을 이어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상의 교수는 28일 "시간이 지날수록 생존 피해자가 줄어들 뿐만 아니라 육체·정신적 기능이 떨어지기 때문에 예전 일을 전달하기 어렵다"며 "앞으로 조속히 구술 채록 사업이 진행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행정안전부 등에 따르면 국내에 생존하고 있는 일제 강제동원 생존피해자는 2016년 8천99명에서 지난해 2월 기준 3천140명, 이달 기준 2천400명으로 급속히 줄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