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 끝을 촛불이나 향으로 태우고 곧바로 맨손으로 불을 끈다.

한지 끝자락에는 불이 만들어낸 선과 색이 남는다.

한지와 불의 '협업'이다.

30년간 한지를 활용한 독창적인 작업을 해온 작가 김민정은 수행하듯 한지를 태우고 그 조각을 섬세하게 배열해 작품으로 탄생시킨다.

한지는 그림의 바탕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중요한 예술적 매체가 된다.

여기에 오직 불로만 낼 수 있는 효과가 더해진다.

서울 종로구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19일 개막하는 김민정 개인전 '타임리스(Timeless)'는 한지를 기반으로 한 작가의 대표작과 신작 등 총 30여 점을 소개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운영하던 작은 인쇄소에서 종이를 장난감처럼 갖고 놀던 작가는 동양화를 전공하고 1991년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났다.

작가는 그곳에서 한지에 더 매달렸다.

1990년대 먹과 수채 물감의 얼룩과 번짐 효과를 극대화한 추상 작품을 발표했고, 200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한지를 태우는 작업에 나섰다.

김민정은 "1990년대 초 사진과 영상 작업이 유행했지만 나는 새로운 것을 따라하기보다 잘 할 수 있는 것, 해온 것을 계속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동양화의 기초가 되는 선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한지를 태우기 시작한 작가는 종이와 불이 만든 또 다른 선에 매료됐다.

종이를 태우는 행위에 대한 철학적인 성찰도 더해졌다.

작가는 "종이는 인간의 발명품 중 가장 약하면서도 몇천 년을 살아남는 질긴 존재"라며 "한지가 타고 남는 선은 종이가 없어지기 직전의 상태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전시와 같은 제목의 '타임리스' 연작은 국내에서는 처음 선보이는 작품이다.

셀 수 없이 많은 한지 띠를 구도하듯 촘촘하게 이어붙였다.

불에 탄 한지 끝 선이 잔잔한 물결을 이루며 완전히 새로운 추상 화면이 된다.

미세하게 그을린 반투명 한지 조각이 겹쳐져 입체적인 아름다움을 빚어내는 '스컬프처'는 정밀한 공예품처럼 고도로 통제된 조형미를 보여준다.

멀리서는 보이지 않지만, 작품에 바짝 다가가면 한지를 태우고 조각을 배열하는 데 들인 작가의 정성과 열정을 느낄 수 있다.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활동해 온 김민정은 세계적인 미술 기관에서 연이어 개인전을 열고 세계적인 출판사 파이돈이 최근 펴낸 미술서 '비타민 D3: 오늘의 동시대 드로잉 베스트'에 소개되는 등 국제적 명성을 쌓고 있다.

전시는 3월 28일까지.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