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동행] 위암 말기 극복 후 23년째…2만시간 봉사왕 인천 김용복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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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사 분야 구분없이 활동…"각자 능력의 3%만 이웃을 위해 쓰세요"
"바닷물이 썩지 않는 이유는 3%의 염분 때문이라고 합니다.
모두가 각자의 능력에서 3%만 어려운 이웃을 위해 쓴다면 세상이 썩지 않을 겁니다.
"
충남 부여가 고향인 김용복(74)씨는 어릴 적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면서 가정 형편이 급격히 기울었고 돈부터 벌어야 했기 때문이다.
형제도 없다.
고교 1학년 때 할머니를 모시고 상경한 후 서울의 제강회사에서 기계를 수리하며 돈을 벌었다.
차량 정비병으로 군 복무를 한 뒤에는 기계회사에 취업해 인천에서 자리를 잡았다.
그는 회사가 이전하면서 20년가량 경남 창원에서 살다가 1993년 느닷없이 위암 말기 진단을 받고 절망했다.
"암 선고를 받을 당시 담당 의사가 한 말이 잊히지 않았습니다.
'더 치료가 안 되니 마음부터 치료해야 한다'고 했어요.
아프리카에 가서 의료봉사를 했던 이야기를 하시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효과가 있다'며 자원봉사를 권유하시더라고요"
6개월간 입원해 암 치료를 받은 끝에 의사의 예상과 달리 기적처럼 건강을 되찾았지만 당장 의사의 말을 실행해 옮기진 못했다.
돈은 계속 벌어야 했다.
암 수술 후 복직해서도 두바이에서 해외 파견 근무를 했다.
4년 뒤 명예퇴직을 하고서야 그 당시 의사의 말을 실천했다.
고향인 부여로 돌아간 그는 친구의 도움으로 폐가를 수리해 거처를 마련했고 자원봉사를 시작했다.
23년 전인 1998년이었다.
동네 할머니들이 지은 딸기나 오이를 트럭에 싣고 시장에 가서 대신 팔아다가 돈을 쥐여줬다.
김씨가 중간에서 갖는 돈은 없었다.
말 그대로 봉사였다.
할머니들이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메모지에 적어뒀다가 봉사를 다녀오는 길에 대신 사다 주기도 했다.
"시골 노인들이 농사를 지어도 먼 장터까지 물건을 머리에 이고 다녀오기를 힘들어하셨어요.
지금도 고맙다며 부여에서 밤 같은 농산물을 보내주시는 분들이 있는데 얼마나 뿌듯한지 모릅니다"
인천으로 다시 돌아온 뒤에도 종종 부여를 오가며 이른바 '농산물 판매 대행' 봉사활동을 7년간 계속했다.
분야를 가리지 않는 본격적인 봉사는 2007년부터 시작했다.
장애인의 이사를 돕고 홀몸노인들이 부르면 각종 공구를 챙겨서 달려가 집을 고쳐줬다.
인천 산곡동에 있는 김씨의 자택에는 공구만 모아둔 창고가 따로 있을 정도다.
그는 2009년부터는 집 앞 무료 공영주차장에서 매일 오전 6시부터 4시간 동안 무보수로 차량 출입을 관리하고 있다.
"차량 29대를 댈 수 있는데 인근 주택가의 차량 대수보다 공간이 부족하다 보니 앞뒤로 이중 주차를 많이 해요.
출근 시간에 관리할 사람이 없으면 서로 싸우고 난장판이 됩니다.
집에 찾아가서 차 좀 빼달라고 얘기하는 사람이 한 명만 있으면 마을 전체가 평온합니다.
"
김씨는 이웃 30여명과 마음을 모아 '주사모'라는 봉사단도 만들었다.
주민과 이웃을 사랑하는 모임의 준말로 단장은 김씨다.
산불감시, 마을 쓰레기 줍기, 김장 나눔, 마을 도색, 살충제 살포 등 주사모 봉사단의 활동은 분야를 가리지 않았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한 지난해부터는 어린이집이나 교회를 돌며 방역 활동도 하고 있다.
인천시자원봉사센터 기록을 보면 그는 2007년부터 계산해 자원봉사로만 2만 시간을 넘겼다.
2만 시간은 매일 4시간씩 14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봉사해야 채울 수 있다.
최저임금으로만 계산해도 1억원을 훨씬 넘는 가치가 있는 시간이다.
매년 12월 '자원봉사의 날'마다 구청장 표창을 받았고, 2014년과 지난해에는 행정안전부 장관상도 그의 몫이었다.
김씨는 6일 "저도 제 능력의 3%만 자원봉사에 쓴다"며 "나이가 들면서 봉사할 때 힘이 들기도 한다"고 토로했다.
그러나 "하고 나면 굉장히 뿌듯하고 에너지도 생긴다"며 "봉사가 돈보다 좋다"고 웃었다.
/연합뉴스
![[#나눔동행] 위암 말기 극복 후 23년째…2만시간 봉사왕 인천 김용복씨](https://img.hankyung.com/photo/202102/AKR20210205094100065_01_i_P4.jpg)
모두가 각자의 능력에서 3%만 어려운 이웃을 위해 쓴다면 세상이 썩지 않을 겁니다.
"
충남 부여가 고향인 김용복(74)씨는 어릴 적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면서 가정 형편이 급격히 기울었고 돈부터 벌어야 했기 때문이다.
형제도 없다.
고교 1학년 때 할머니를 모시고 상경한 후 서울의 제강회사에서 기계를 수리하며 돈을 벌었다.
차량 정비병으로 군 복무를 한 뒤에는 기계회사에 취업해 인천에서 자리를 잡았다.
그는 회사가 이전하면서 20년가량 경남 창원에서 살다가 1993년 느닷없이 위암 말기 진단을 받고 절망했다.
"암 선고를 받을 당시 담당 의사가 한 말이 잊히지 않았습니다.
'더 치료가 안 되니 마음부터 치료해야 한다'고 했어요.
아프리카에 가서 의료봉사를 했던 이야기를 하시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효과가 있다'며 자원봉사를 권유하시더라고요"
6개월간 입원해 암 치료를 받은 끝에 의사의 예상과 달리 기적처럼 건강을 되찾았지만 당장 의사의 말을 실행해 옮기진 못했다.
돈은 계속 벌어야 했다.
암 수술 후 복직해서도 두바이에서 해외 파견 근무를 했다.
4년 뒤 명예퇴직을 하고서야 그 당시 의사의 말을 실천했다.
![[#나눔동행] 위암 말기 극복 후 23년째…2만시간 봉사왕 인천 김용복씨](https://img.hankyung.com/photo/202102/AKR20210205094100065_04_i_P4.jpg)
23년 전인 1998년이었다.
동네 할머니들이 지은 딸기나 오이를 트럭에 싣고 시장에 가서 대신 팔아다가 돈을 쥐여줬다.
김씨가 중간에서 갖는 돈은 없었다.
말 그대로 봉사였다.
할머니들이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메모지에 적어뒀다가 봉사를 다녀오는 길에 대신 사다 주기도 했다.
"시골 노인들이 농사를 지어도 먼 장터까지 물건을 머리에 이고 다녀오기를 힘들어하셨어요.
지금도 고맙다며 부여에서 밤 같은 농산물을 보내주시는 분들이 있는데 얼마나 뿌듯한지 모릅니다"
인천으로 다시 돌아온 뒤에도 종종 부여를 오가며 이른바 '농산물 판매 대행' 봉사활동을 7년간 계속했다.
분야를 가리지 않는 본격적인 봉사는 2007년부터 시작했다.
장애인의 이사를 돕고 홀몸노인들이 부르면 각종 공구를 챙겨서 달려가 집을 고쳐줬다.
인천 산곡동에 있는 김씨의 자택에는 공구만 모아둔 창고가 따로 있을 정도다.
그는 2009년부터는 집 앞 무료 공영주차장에서 매일 오전 6시부터 4시간 동안 무보수로 차량 출입을 관리하고 있다.
"차량 29대를 댈 수 있는데 인근 주택가의 차량 대수보다 공간이 부족하다 보니 앞뒤로 이중 주차를 많이 해요.
출근 시간에 관리할 사람이 없으면 서로 싸우고 난장판이 됩니다.
집에 찾아가서 차 좀 빼달라고 얘기하는 사람이 한 명만 있으면 마을 전체가 평온합니다.
"
![[#나눔동행] 위암 말기 극복 후 23년째…2만시간 봉사왕 인천 김용복씨](https://img.hankyung.com/photo/202102/AKR20210205094100065_03_i_P4.jpg)
주민과 이웃을 사랑하는 모임의 준말로 단장은 김씨다.
산불감시, 마을 쓰레기 줍기, 김장 나눔, 마을 도색, 살충제 살포 등 주사모 봉사단의 활동은 분야를 가리지 않았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한 지난해부터는 어린이집이나 교회를 돌며 방역 활동도 하고 있다.
인천시자원봉사센터 기록을 보면 그는 2007년부터 계산해 자원봉사로만 2만 시간을 넘겼다.
2만 시간은 매일 4시간씩 14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봉사해야 채울 수 있다.
최저임금으로만 계산해도 1억원을 훨씬 넘는 가치가 있는 시간이다.
매년 12월 '자원봉사의 날'마다 구청장 표창을 받았고, 2014년과 지난해에는 행정안전부 장관상도 그의 몫이었다.
김씨는 6일 "저도 제 능력의 3%만 자원봉사에 쓴다"며 "나이가 들면서 봉사할 때 힘이 들기도 한다"고 토로했다.
그러나 "하고 나면 굉장히 뿌듯하고 에너지도 생긴다"며 "봉사가 돈보다 좋다"고 웃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