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하게 바꾼다더니…난장판 된 공모주 배정 [전예진의 공모주 투자]
최근 공모주에 투자해본 사람들은 두 가지 부류로 나뉩니다. 충격에 빠진 자와 회심의 미소를 짓는 자.

전자는 적지 않은 종잣돈을 가지고 공모주에 투자했던 이들이고, 후자는 아마도 소액으로 공모주를 처음 시작한 이들일 겁니다. 이유는 공모주 균등 배정제 때문입니다.

그동안은 청약 증거금을 많이 넣는 투자자가 더 많은 공모주를 받는 비례 배정제였습니다. 고액 자산가들이 수억원대 증거금을 납입해 공모주를 싹쓸이해가는 것이 다반사였죠.

이것이 불공평하다는 지적 때문에 올해부터 균등 배정제가 도입됐습니다. 개인 투자자들에게 배정된 물량의 절반 이상을 균등제로 나눠줘야하는 제도입니다. 최소 청약단위인 10주 이상만 청약하게 되면 누구나 똑같은 수량의 공모주를 받을 수 있습니다.

취지는 좋습니다. 예전엔 돈이 많지 않은 사람은 공모주를 받을 수 없었으니 말이죠. 균등제가 시행되면서 청약자들은 10만원도 안되는 돈으로 3~4주를 받을 수 있게 됐습니다. 비례배정제에서는 수천만원을 내도 1주를 받을까말까했는데 그야말로 '횡재'입니다.

이 소식이 널리 퍼지자 공모주 투자에 뛰어드는 사람들이 급증했습니다. 최근 균등배정 방식으로 청약을 진행한 5개사의 청약건수는 평균 10만5000여건에 달합니다. 비례배정방식으로 진행한 청약 건수의 2배입니다.
공정하게 바꾼다더니…난장판 된 공모주 배정 [전예진의 공모주 투자]
문제는 균등 배정제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나눠주는 주식수가 균등하지 않다는 겁니다. 증권사마다 배정된 공모물량이 다르고 청약자수가 다르다보니 균등배정 주식수에 큰 차이가 발생하기 때문인데요.

지난 2일 상장한 솔루엠의 경우 청약한 증권사가 어디냐에 따라 주식수가 판이하게 달라졌습니다. 이 회사는 미래에셋대우, KB증권, 하나금융투자, 신한금융투자, 삼성증권 등 5곳에서 청약을 진행했습니다. 똑같이 10주를 청약했더라도 미래는 5주, KB 하나 신한은 3주, 삼성은 1주를 받았죠.

삼성증권에서는 더욱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온라인 등급 최대 청약 수량인 1600주(증거금 1360만원)를 신청한 사람이나 10주(증거금 8만5000원)를 신청한 사람이나 동일하게 1주를 받은 겁니다.

1600주를 신청한 사람은 무척 억울하겠죠. 아니, 삼성증권을 택한 사람들은 다 억울할 겁니다. 미래에셋대우에서 청약했다면 똑같은 돈으로 4주를 더 받았을테니까요.

이런 일이 생긴 건 균등배정 물량을 전체 수량의 50% 이상으로 해야한다는 조건을 걸어놓았기 때문입니다. 49.99%도 안되고 무조건 절반 이상을 똑같이 나눠줘야하는 겁니다.

삼성증권에서 솔루엠 청약에 참가한 투자자는 5만1527명, 배정물량은 6만4000주였으니 1주씩만 나눠줘도 배정이 거의 끝납니다. 남은 1만2000여주로 비례 배정을 하니 경쟁률은 약 4800 대 1까지 치솟았습니다. 아무리 많은 증거금을 넣어도 받을 수 있는 주식이 없었던 것이죠.

이렇게 주식을 나눠주다보니 균등 배정 물량은 전체 수량의 80%가 됐습니다. 청약자 수가 많아질수록 비례 배정 물량은 더욱 줄어들 수 밖에 없겠죠. 청약 증거금보다 머릿수가 중요하다는 것을 간파한 청약자들이 가족과 자녀 계좌를 동원하고 있어서 조만간 90% 이상이 균등 배정제가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삼성증권에서 솔루엠 청약에 10만명이 몰렸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6만4000주를 10만명에게 동일하게 나눠줄 수 없으니 모든 청약자들을 대상으로 무작위 추첨해 1주씩 줘야할 겁니다. 아무런 원칙 없이 운에 맡기는 슬롯머신이나 다름 없습니다. 공평하게 기회를 준다고 제도를 바꾼 것이 랜덤 배정이라니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금융당국은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제도 개편 초기 '균등배정 50%, 비례배정 50%'로 정해놓은 이유는, 그래도 절반은 비례 배정 물량을 남겨뒀으니 나름대로 합리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겁니다.

공모주 투자자들은 이제 마이너스 통장과 대출로 '영끌'해 청약하는게 바보짓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대신 최소 청약 수량만큼 넣고 균등 배정을 받으려는 똑똑한 투자자들이 늘어났습니다. 똑똑한 투자자들도 언젠가는 운이 없으면 공모주를 아예 배정받지 못하는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전예진 기자 ac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