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한 장면에서 리카는 고조에게 파격적이라며 정기예금 상품을 소개한다. 그런데 1년 금리는 0.8%에 불과했다. 이렇듯 1990년대 중반 일본의 금리는 매우 낮은 상황이었다. 장기 불황을 극복하기 위해 일본 중앙은행이 정책금리를 극적으로 낮췄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의 상황은 그 이후 10여 년이 지나서도 좋아지지 않았다. 낮은 금리에도 왜 일본 경제는 회복되지 않았을까.

버블(거품) 붕괴, 금융위기 등에 의한 경기침체가 오면 정부는 금리를 내리게 된다. 경기를 살리기 위해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불황 시작 국면에서 신속하게 금리를 내려야 한다는 점이다. 미국 중앙은행은 2008년 금융위기가 닥치자 곧바로 정책금리를 연 1.5%에서 연 1%로 급격하게 인하했다. 통상 0.25%포인트씩 조정하는 금리를 단번에 0.5%포인트 내린 것이다. 올해 3월에도 코로나19에 의한 불황이 예고되자 0.5%포인트를 내린 바 있다.

너무 늦은 금리 인하는 '디플레의 저주'가 되고…
이는 ‘디플레이션의 저주’를 피하기 위해서다. 경기 하방 압력에 모든 물가가 떨어지는 디플레이션이 시작되면, 정책금리 인하는 더 이상 경기 회생 카드로서 실효성을 잃게 된다. 경제 주체들이 대출, 소비를 늘리는 기준은 실질금리인데, 디플레이션 상황에서는 중앙은행이 아무리 명목금리를 낮춰도 실질금리가 떨어지기 힘들기 때문이다. 실질금리는 명목금리에서 물가상승률을 뺀 것을 의미한다.

일본 중앙은행은 1990년 버블이 붕괴한 직후 금리 인하를 머뭇거렸다. 당시 벌어졌던 걸프전을 너무 의식했던 탓이다. 중동에서 발발한 걸프전은 국제 유가를 폭등시켰고, 국제 유가 폭등은 통상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진다. 일본 중앙은행은 이 효과를 과대평가한 나머지 금리 인하에 소극적이었다.

일본 중앙은행은 1991년 중반을 넘어서야 금리를 내렸다. 하지만 때는 늦었다. 이미 만성적인 디플레이션이 시작됐고, 금리를 내려도 사람들이 느끼는 실질금리는 떨어지지 않았다. 이에 일본 중앙은행은 지속해서 금리를 낮췄다. 리카가 영업하던 1995년 시장에서 예금 금리가 연 0.8%면 매우 파격적이란 이야기가 나온 배경이다.

구민기 기자 koo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