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언택트'로 본 비대면 시대
헤어진 연인이 말한다 "구독, 좋아요! 눌러주세요"
예기치 않은 코로나19 사태에 프랑스에서 급히 귀국한 성현(김주헌 분)은 14일간의 자가 격리에 들어간다. 넓지 않은 도심의 오피스텔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리 많지 않다. 2주간 맞닥뜨려야 할 긴 자신과의 싸움이 막막하기만 하다. 그러던 중 친구로부터 옛 연인 수진(김고은 분)이 유튜브에서 브이로그(일상을 촬영한 영상 콘텐츠)를 운영한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지난 10월 개봉한 김지운 감독의 단편 영화 ‘언택트’는 코로나19 속 일상에서 과거에 헤어진 연인이 서로를 비대면으로 접하며 그리워하는 내용을 담은 로맨스 영화다. 국내 최초로 휴대폰 8K 영상으로 전 과정을 촬영해 모바일을 통해 상영하면서 이목을 끌었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이제는 일상으로 자리잡은 ‘언택트 시대상’을 실감나게 그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게으름 경제’가 부른 ‘배달 일상’
영화 속 성현의 하루는 길고도 길다. 매일 공무원으로부터 ‘발열 증상이 없느냐’며 걸려 오는 전화가 얼마 되지 않는 외부와의 소통이다. 구청에서 보내준 즉석 조리식품 중 무엇을 먹어야 할까가 하루의 최대 고민이다. 손수 드립 커피도 내려 마셔 보고, 소파에 기댄 채 읽고 싶던 책도 훑어보지만 시간은 도무지 흐르지 않는다. 스르르 잠이 들었다가 깬 뒤 시계를 쳐다보지만 바늘은 더디게만 간다.답답한 일상이지만 살아가는 데는 큰 무리가 없다. 배달되는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고, 필요한 대부분의 물품은 온라인을 통해 배송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우리의 일상도 마찬가지다. 이동 및 다른 사람과의 만남이 불필요하다는 생각이 강해지면서 ‘게으름 경제(lazy economy)’는 이미 하나의 사회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게으름 경제’란 자신이 원하는 일 외에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어 하는 현대 소비자들이 주도하는 경제를 뜻하는 말이다. 이들은 음식 배달·배송은 기본이고 청소·빨래 등 집안일, 잡다한 심부름 등을 비롯해 ‘본업’이 아닌 분야는 주로 대행 서비스를 이용한다. 대신 아낀 시간을 자신이 원하는 곳에 쓴다. 지난 4월 설문조사 업체 오픈서베이가 20~59세 남녀 소비자 15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 따르면 배달 서비스 이용자 중 절반 이상(59.5%)은 1주일에 한 번 이상 배달을 이용했다. 이용하는 이유로는 ‘집에서 음식을 해먹기 귀찮아서’라고 답한 비중이 ‘외부 환경 요인으로 외출이 꺼려져서’보다 높았다. 사실은 코로나19 감염 우려보다 ‘귀차니즘’이 더 많은 배달 폭증을 부른 셈이다. 배달을 통한 일상에 익숙해진 성현이 격리가 끝나고 나서도 배달 음식을 즐겼을 것으로 예측되는 이유다.
‘구독’을 누르니 달라진 세상
지루하지만 별 탈 없이 격리 11일째를 맞은 성현에게 외로움이라는 최대 고비가 찾아온다. 수진에게 메시지를 보내 보려 휴대폰을 쥐었다가 이내 그만둔다. 그녀에게 아무런 약속도 하지 못하고 메시지 하나 남긴 채 홀로 유학길에 올랐고, 미안함에 3년간 단 한 번도 연락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신 유튜브를 열어 본다. 수진이 운영하는 채널 ‘지니TV’에는 그녀가 예전 그 모습 그대로 서 있다.도예 공방을 운영하는 수진은 개인 채널에서 먹방(먹는 방송), 운동 등 평소 일상을 담은 브이로그 채널을 운영 중이었다. 성현은 이곳에서 수진의 일상을 훔쳐본다. 삼겹살을 입에 넣고 활짝 웃는 모습을 보며 격리 생활 중 처음으로 미소를 띤다. ‘초보 요기니’라며 친구와 어설픈 요가 동작을 하다 무너지는 모습도 귀엽기만 하다. “구독, 좋아요! 꼭 눌러주실 거죠?” 영상 마지막에 나오는 그녀의 부탁에 손가락은 어느새 구독 버튼을 향한 지 오래다.
코로나19 이후 급격히 부상한 또 다른 메가 트렌드가 ‘구독경제’다. 구독경제는 제품이나 서비스를 소비자가 구독하면 정기적으로 보내주는 비즈니스 모델을 일컫는 말이다. 매일 아침 집 앞에 셔츠를 드라이클리닝해 가져다 준다거나, 매달 같은 날짜에 전통주나 꽃·화장품·속옷 등을 골라 보내주는 서비스 등 종류는 무궁무진하다. 콘텐츠 분야에서는 유튜브가 대표적이다. 글로벌 투자은행 크레디트스위스(CS)는 세계 구독경제 규모가 2015년 4200억달러에서 올해 5300억달러 규모로 커질 것으로 예상했다.
구독경제 체제 하에서는 ‘어떤 상품을 만드느냐’보다 ‘기존 상품을 어떻게 구독하도록 만들까’가 기업들의 주된 고민이 된다. 같은 재화라도 구성과 포장을 그럴듯하게 해야 소비자의 선택을 받을 수 있다. 유명 유튜버들이 콘텐츠 시작과 끝마다 ‘구독’을 눌러달라고 신신당부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구독’이 곧 ‘구매’가 되는 세상이 됐기 때문이다. 구독은 꾸준한 서비스 이용과 이익 창출로 이어진다.
‘지니TV’ 구독자 성현의 얼마 남지 않은 격리 일상은 어느새 수진의 일상으로 채워져 간다. 그의 격리 해제 전날, 수진은 홀로 캠핑을 떠난 모습을 유튜브에 생중계한다. 성현이 유학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함께 캠핑을 했던 곳이다. 이곳에서 함께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며 더 없이 행복한 시간을 보냈지만, “프랑스에 같이 갈래?”라는 물음에 그녀는 확답을 하지 못했다. 성현은 실시간 채팅창에서 ‘전 남친과는 왜 헤어진 거냐’ ‘용서할 마음이 있느냐’는 등 마음속 남겨둔 질문을 줄줄이 남기며 듣지 못한 답변을 훔쳐본다.
꼭 옛 연인의 방송이 아니더라도 유튜브, 넷플릭스 구독자 중 특정 방송이나 콘텐츠에 중독돼 헤어나오지 못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경제학적 개념으로는 ‘현상 유지 편향’과 ‘소유 효과’가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어떤 대상을 소유하게 되면 더 많은 가치를 두고, 변화(다른 콘텐츠를 보는 것)를 회피하게 되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이들 서비스도 다양한 알고리즘 기술을 활용해 소비자가 ‘구독’이나 ‘몰아보기’를 하도록 끊임없이 유도한다. 어쩌다 보니 매달 일정 금액을 납부하는 유료 구독 서비스를 장기 이용하는 소비자도 많다. 첫달만 무료로 결제를 유도한 뒤 계속 자동 결제를 하게 만드는 서비스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의 선택을 번복하기 싫어 하는 소비자들을 노린 이런 기업들의 기술(?)을 ‘다크 넛지(dark-nudge)’라고 한다. 강압하지 않고 부드러운 개입으로 사람들이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방법을 뜻하는 ‘넛지’의 반대 개념이다.
‘비대면’ 대신 스스로 선택한 ‘대면’
성현은 수진과 ‘보이지 않는 대화’를 나누다가 할 일이 남아 있음을 깨닫는다. 자가 격리가 풀리자마자 그는 캠핑장에 홀로 남아 있는 수진을 향해 달려간다. 그녀가 방송에서 ‘꼭 타보고 싶었다’고 말하던 2인용 자전거를 빌려 탄 채.행동경제학의 가장 기본이 되는 이론 중 하나는 ‘손실 회피’다. 손실로 인해 주는 불만족이 이익이 가져다 주는 효용보다 더 크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새로운 시도를 쉽사리 하지 못하고 현재 상황이나 판단에 머무르게 되는 이유다. 홀로 훌쩍 떠났던 성현도 이 이론의 벽을 넘지 못했었다. 그랬던 그가 영화 말미에는 비겁했던 비대면 세상 뒤의 자신을 내던지고 대면 세상의 그녀를 향해 나아간다. 어쩌면 어떤 경제학의 법칙도 사랑이라는 키워드를 낱낱이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일지도 모른다.
정소람 기자 ra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