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꾼에서 영웅으로…언어가 가진 생성의 힘
[영화 속 그곳] 부다페스트 스토리
전쟁에 나갔던 남자가 살아서 집으로 돌아온다.

수년간 생사의 고비를 넘긴 그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다는 기대에 부푼다.

하지만 한편으론 걱정과 두려움도 떨칠 수 없다.

가족들은 무사한 걸까.

아이들은 잘 자랐을까.

아내에게 다른 남자가 생긴 건 아닐까.

그의 머릿속은 복잡하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 이후 서양에선 전쟁에서 돌아온 남자를 둘러싼 이른바 '귀향 서사'의 문학적 전통이 면면하다.

일찍부터 원정 정복 전쟁을 벌여온 서양 역사의 산물이다.

거기에 무수히 많은 이야깃거리가 있다.

'전쟁터에서의 귀향'과 '남편의 부재'가 만들어낸 서사들이다.

국내에서는 흔히 보기 어려운 헝가리 영화 '부다페스트 스토리'(연출 사스 아틸라)도 전쟁과 귀향을 기본 얼개로 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남자 주인공이 전쟁에서 돌아온 남편이 아니라 그 남편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는 남자라는 점이다.

[영화 속 그곳] 부다페스트 스토리
◇ "그는 영웅이었죠"…사기꾼 한코
헝가리의 역사는 파란만장하다.

13세기 몽골의 침략과 대량 살육 이후 오랜 세월 터키와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았고 1차 세계대전 패배로 전 국토의 3분의 2를 잃었다.

2차 세계대전 때는 수도 부다페스트의 70% 이상이 파괴됐다.

'부다페스트 스토리'는 피지배와 전쟁의 그 우울한 역사 끝자락에 있는 2차 세계대전 직후 헝가리가 그 무대다.

주인공 한코는 전쟁통에 실종된 사람들을 찾는 신문 광고를 보고 광고를 낸 가족을 찾아가 자신이 같은 부대에 있었다고 거짓말하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기꾼이다.

그는 가족을 찾아가 실종된 사람이 영웅이었고, 극적으로 헤어진 뒤 소식을 모른다고 똑같은 거짓말을 한다.

그 보상으로 외투나 음식, 숙박 등을 받지만, 한코의 이런 사기 행각은 한편으론 실종자 가족들에게 희망과 위안을 주기도 한다.

[영화 속 그곳] 부다페스트 스토리
결국 거짓말이 발각돼 도주하던 한코는 우연히 부다페스트 근교 숲속에 사는 유디트와 그의 어린 아들을 만난다.

그는 유디트의 남편도 전쟁에 나가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똑같은 식으로 거짓말을 한다.

문제는 유디트의 남편 빈체가 아내와 주변 사람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야비한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유디트는 남편의 죽음을 기정사실로 한 채 한코에게서 새로운 삶의 희망을 찾으려 한다.

두 사람은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그러나 누구나 예상하듯이 죽은 줄 알았던 남편 빈체가 돌아온다.

빈체는 다시 남편 행세를 하기 시작하고 한코는 졸지에 정부의 신세가 된다.

[영화 속 그곳] 부다페스트 스토리
◇ 발화된 언어가 만든 새로운 세계
이 지점부터 영화는 로맨스에서 스릴러로 바뀌어간다.

영화가 시작될 때 하찮은 거짓말을 하며 살아가는 사기꾼이었던 한코는 어느새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거는 '영웅'이 된다.

영웅을 소재로 거짓말을 하던 한코가 자신이 지어낸 가상의 스토리 속에 나오는 진짜 '영웅'이 되는 것이다.

만들어낸 이야기가 실화가 되는 과정을 우리는 '발화'가 가진 힘으로 체험한다.

'말이 씨가 된다'는 표현과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기독교적 세계관에서도 우리는 발화된 언어가 획득하는 물리적 힘을 감지한다.

실재하지 않는 세계가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만들어져 언어로 발화되고, 이렇게 바깥으로 나온 가상의 세계는 누군가의 행동으로 실재하는 세계가 된다.

현실과 비현실은 이렇듯 우리의 의식과 행동을 통해 수시로 그 경계를 넘나든다.

[영화 속 그곳] 부다페스트 스토리
언어의 발화가 새로운 세계를 생성하듯이, 침묵도 그에 못지않은 힘을 가진다.

모리스 블랑쇼는 "언어는 침묵하지 않는다.

바로 침묵이 언어 속에서 말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제 우리는 깨닫는다.

언어가 가진 창조의 능력과 문학이 가진 생성의 힘을. 말을 해야 할 이유도, 말을 아껴야 할 이유도 모두 여기에 있다.

◇ 부다페스트의 힘
이 영화의 헝가리어 원제목은 'Apro Mesek'이다.

영어로는 'Tall Tales'로, 황당한 이야기라는 뜻이다.

[영화 속 그곳] 부다페스트 스토리
영화는 오프닝부터 거짓말이 탄로 난 한코가 도주하는 17분까지, 그리고 엔딩 시퀀스를 부다페스트에서 찍었다.

나머지는 부다페스트에서 멀지 않은 숲에서 촬영했다.

영화의 주된 서사가 이뤄지는 곳이 부다페스트 도심은 아니다.

그런데도 한국판 제목이 부다페스트 스토리가 된 것은 부다페스트가 주는 힘 때문이 아닐까.

유럽의 그 어느 화려한 도시보다도 야경이 빛나는 곳, 짙푸른 다뉴브강이 천년의 역사가 새겨진 도심을 도도히 흘러가는 곳, '글루미 선데이'(Gloomy Sunday)의 우울함도 더없는 아름다움이 되는 곳이 바로 부다페스트다.

[영화 속 그곳] 부다페스트 스토리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0년 10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