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넷 '굿걸' 출연해 주목…"아무도 해치지 않는 음악, 디폴트 됐으면"
'순두부', 그리고 페미니스트…우리가 만난 오롯한 슬릭
엠넷 여성 뮤지션 예능 '굿걸 : 누가 방송국을 털었나' 시청자들이 래퍼 슬릭(본명 김령화)에게 빠져들기 시작한 것은 의외의 장면에서다.

동료 출연자들의 음악은 다 알고 있었지만 TV가 없어 얼굴을 몰랐던 그는 이들이 자기 이름을 소개할 때마다 '진심을 다해' 놀란다.

순둥한 얼굴로 연신 외친 "못 알아봤습니다!"는 프로그램 초반 유행어가 되다시피 했다.

최근 용산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슬릭은 "처음에는 그 모습을 좋아해 주셔서 이해가 안 됐다.

왜 저렇게 바보 같은 모습을(웃음) 자꾸만 돌려보지? 지금은 너무 감사하다"며 털털하게 웃었다.

슬릭은 페미니스트 래퍼로서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소수자의 권리를 말해 온 뮤지션이다.

'쇼미더머니', '언프리티 랩스타' 등 래퍼 경연에 비판적 시각도 내비친 적이 있는 그가 엠넷 프로그램에 나온다니 뜻밖이라는 반응이 많았다.

그러나 막상 경연이 시작된 후 그는 넓고도 유연한 음악적 스펙트럼을 증명했다.

소녀시대 효연과의 유닛 무대를 위해 밤낮없이 춤연습을 하는 등 경연 과정에서 보여준 진지하면서도 꾸밈없는 태도를 두고 '비장한 순두부'라는 별명도 생겼다.

슬릭은 "(예전에는) 내가 앞으로 어떤 음악을 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이 많았고 경쟁구도에도 비판적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며 "시간이 지나고 앞으로 어떻게 음악을 하고 살아야 할지도 조금씩 알게 된 와중에 (섭외) 전화가 왔고, '경쟁 프로그램이 아니다'라는 PD님의 말에 솔깃했다"고 출연을 결정한 과정을 설명했다.

서로 다른 배경의 여성 뮤지션 9명과 함께한 경험을 묻자 "다들 정말 프로페셔널한 사람들"이라고 힘줘 말했다.

"정말 누구랑 이야기를 해도 배울 것 투성이였어요.

아홉 명한테 다 하나씩은 크게 배운 게 있었어요.

그래서 집에 오면 늘 생각이 되게 많아졌어요.

내가 놓치고 있던 부분도 있었구나.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 있었구나.

돈 받고 배움을 얻은 느낌이었죠."
'순두부', 그리고 페미니스트…우리가 만난 오롯한 슬릭
마지막 무대는 성적인 이미지를 거침없이 발산하는 '19금 래퍼' 퀸 와사비와 함께 꾸며 화제가 됐다.

일면 스펙트럼 양쪽 끝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두 여성 뮤지션이 경쾌하게 춤추며 "색안경 집어치워"라고 외치는 장면은 상징적이다.

두 사람의 음악적 메시지를 이어주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주체적 태도다.

슬릭은 둘이 상극일 것 같다는 시선을 "오히려 아주 나중에 깨달았다"고 했다.

"사실은 퀸 와사비씨랑 가장 먼저 친해졌어요.

팀이 되기 전부터 많은 대화를 나눴고요.

남은 퀘스트 중에 무조건 한 곡은 같이 하자고 늘 얘길 했어요.

… 우리의 음악에 좀 더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둘이 비슷한 사람인 것 같다고 하지 않을까요.

"
2013년 레이블 '데이즈 얼라이브'에 영입된 슬릭은 2016년 정규 1집 '콜로서스' 등으로 언더그라운드에서 주목받았다.

그러나 같은 해 한 방송에서 힙합 음악 내의 차별적 언어를 정면으로 꼬집으며 페미니스트 선언을 한 뒤 힙합계와 멀어졌다.

당시 그의 일갈은 이렇다.

"여긴 아직도 계집애 같다는 말을 욕으로 한다면서, 아직도 게이 같다는 말을 욕으로 한다면서…"
"늘 기존의 사회적 여성성에서 벗어난 사람"이었지만 외면했었다는 그는 사회학자 우에노 치즈코의 '여성혐오를 혐오한다'를 밤새 읽으며 전환점을 맞는다.

"머리를 백 톤짜리 망치로 친 것처럼, 여기에 내가 몰랐던 세계가 다 담겨 있구나" 하는 느낌을 받고 페미니즘을 공부하게 됐다.

슬릭이 '굿걸' 첫 무대로 선보인 '히어 아이 고'(HERE I GO) 노랫말을 보면 그가 하려는 이야기가 좀 더 선명해진다.

"고민하지 어떤 게 예술가의 삶 / 누구 위에 있기 위해선 존재하지 않아 / 고민하지 아무도 죽이지 않는 노랫말."
슬릭은 "저는 그게 음악의 디폴트가 되면 좋겠다.

아무도 해치지 않는 음악을 하면서 다양한 얘기를 하면 얼마나 좋을까"라며 "그게 음악적인 자유를 해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히어 아이 고'를 부를 때 맨발로 무대를 디디고 섰다.

성소수자를 상징하는 무지개 깃발 두 개를 무대에 세웠다.

방송이 나간 뒤 "슬픈 무대가 아닌데 눈물이 났다", "감동했다"는 연락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는 "방송이라는 큰 스피커를 이용할 수 있고 내 의견을 100% 전할 수 있는 무대가 있다면 의미를 잘 전달하고 싶다고 생각했다"며 "내가 무슨 음악을 하는 사람이고, 어떤 얘길 하는 사람인지가 오롯이 전달됐으면 했다"고 전했다.

'순두부', 그리고 페미니스트…우리가 만난 오롯한 슬릭
'굿걸'에서 슬릭이 보여준 '순두부' 같은 모습도, 강단 있는 메시지도 결국 페미니스트이자 한 명의 사람으로서 자기다운 모습이었던 셈. 그는 "더는 미디어가 가지는 영향 혹은 제가 받는 영향에 연연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나대로' 있고 와도 전혀 상관이 없었다"고 했다.

"페미니스트에 대한 선입견이 슬릭 덕분에 깨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뿌듯했다"고도 말했다.

"저는 페미니즘을 공부한 이후로 가장 열려 있는 사람이 됐어요.

페미니즘을 공부하고서 다른 사람의 말이나 의견을 더 들을 수 있게 됐고, 그래서 비건(Vegan·모든 동물성 식품을 섭취하지 않는 채식주의)도 하고 있는 거고요.

"
그는 CJ문화재단의 뮤지션 지원 프로그램인 '튠업'을 공통분모로 만난 재즈 피아니스트 남메아리와 '늦은 감은 있지만'이라는 밴드도 하고 있다.

이 밴드로 "정규 앨범 하나는 내보고 싶다"고 했다.

친한 뮤지션들과 협업 앨범을 만들어보고 싶은 생각도 있다고 한다.

앞으로의 음악적 행보를 묻자 그는 "'굿걸'을 다 마치고 나니까 오히려 더 '내 맘대로 할 거야'가 됐다"고 말했다.

"굿걸 마지막 촬영 때가 되니 음악을 만드는 다양성에 대한 생각이 많이 나더라고요.

이렇게 노래를 만드는 사람도 있고 저렇게 노래를 만드는 사람도 있기 때문에 저 같은 사람도 TV에 나올 수 있었던 거니까, 오히려 더 마음대로 하고 싶고 정말 제가 만들고 싶은 음악을 만들 예정입니다.

"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