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와 기업이 보유한 현금 또는 현금으로 바로 바꿀 수 있는 단기금융상품을 합친 단기자금이 사상 처음 1100조원을 돌파했다. 올 1분기에만 60조원 넘게 급증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에 불확실성이 커지자 가계와 기업들이 선제적으로 유동성 확보에 나선 결과란 분석이 나온다.

19일 한국은행과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현금과 언제든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 요구불예금·수시입출금식 저축성예금·머니마켓펀드(MMF)·종합자산관리계좌(CMA) 등 단기금융상품을 합친 단기자금 잔액은 지난 3월 말 기준 1106조3376억원에 달했다. 지난해 말(1045조5064억원)과 비교해 60조8312억원 늘었다. 1분기 기준으로 역대 최대 증가폭이다.

2016년 12월(910조5940억원) 처음 900조원을 넘어선 단기자금은 2019년 11월 1010조7030억원으로 늘어 1000조원을 돌파했다. 100조원 증가하는 데 약 3년이 걸렸다. 하지만 작년 12월~올해 3월까지 불과 넉 달 새 또다시 100조원이 증가했다.

단기자금이 이처럼 빨리 증가한 것은 코로나19가 큰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코로나19로 경기 침체를 우려하는 비관 심리가 팽배해지자 가계와 기업이 ‘현금 쌓기’에 나선 결과란 설명이다. 한은도 코로나19로 인한 경기 악화에 대응하기 위해 올 3월 17일 기준금리를 연 1.25%에서 연 0.75%로 낮춰 시중의 유동성 공급을 적극적으로 확대했다. 이로 인해 단기자금 증가 속도가 한층 빨라졌다는 평가다.

한은이 발표한 소비자심리지수는 지난 2월 96.9에서 3월 78.4, 4월 70.6으로 수직 낙하했다. 기업 체감심리를 가리키는 기업실사지수도 2월 65, 3월 54, 4월 51로 떨어졌다. 두 지수는 기준선(100)보다 낮을수록 소비자 체감경기가 나쁘다는 뜻이다. 두 지수는 2008년 금융위기 후 가장 낮았다.

코로나19 사태가 확산한 3~4월 회사채, 기업어음(CP) 등 직접금융시장에서의 자금 조달 여건이 악화한 것도 기업들의 현금 축적 요구를 부추겼다. A1 등급 기업어음(CP·91일물) 금리는 3월 17일 연 1.36%에서 13거래일 연속 상승하면서 지난달 2일 연 2.23%까지 0.87%포인트 급등했다. 이 기간 기업들 사이에선 흑자도산 우려가 확산됐다.

가계와 기업이 현금을 움켜쥐면서 상대적으로 소비와 투자는 침체됐다. 올해 1분기 민간소비는 전년 대비 6.4% 줄었다. 외환위기를 겪은 1998년 1분기(-13.8%) 후 가장 크게 감소했다. 설비투자 증가율은 0.2%에 그쳤다. 2019년 1분기(-9.1%) 후 최저치다.

전문가들은 1100조원에 이르는 단기자금이 자산 거품을 일으키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인호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넘치는 단기자금이 일부 주식 시장으로 흘러갔고 부동산 시장으로 다시 몰릴 조짐도 보인다”며 “한은은 지금은 불가피하게 유동성을 풀더라도 나중에 어떻게 이를 흡수할지 구체적인 방안을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익환 기자 lovep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