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은 시민을 향해 총을 겨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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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시각에서 5·18광주항쟁 조명한 '안병하 평전'
5·18 당시 전두환씨의 광주 방문 사실도 밝혀 주목
광주민주화운동이 막바지를 향해 치닫던 1980년 5월 25일, 최규하 대통령은 광주를 방문해 성명서를 발표했다.
계엄군의 도청 진압 작전을 앞둔 이때, 대통령을 수행한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안병하 전남 경찰국장에게 무기를 들고 앞장서 시내로 진입하라고 압박했다.
"경찰은 시민군의 형제, 가족도 있을 테고 이웃도 있는데 경찰이 어떻게 시민들에게 무기를 사용하면서 진압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
안 경찰국장의 대답은 단호했다.
대통령 앞에서 계엄사령관의 유혈 진압, 즉 발포 지시를 일거에 거부해버린 것이다.
계엄군은 초기부터 시민들을 '폭도'이자 섬멸의 대상인 '적'으로 규정했다.
경찰도 이같이 인식하고 앞장서라고 강요했다.
이를 일언지하에 뿌리친 안 경찰국장은 곧바로 계엄사 합동수사본부로 압송돼 8일간 혹독한 고문에 시달려야 했다.
그 후유증으로 8년 동안 투병하다가 1988년 60세 나이로 타계했다.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일을 앞두고 5·18을 경찰의 시각에서 새롭게 조명한 '안병하 평전'이 출간됐다.
5월 항쟁 당시 시민군의 일원으로 전남도청 상황실에서 활동했던 이재의 5·18기념재단 비상임연구위원이 그 저자다.
저자는 광주시민의 목소리를 담은 5·18의 최초 기록물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초고 집필자이기도 하다.
이 위원은 자료와 증언을 바탕으로 1980년 5월 17일부터 전남도청 최종 진압작전 하루 전인 26일까지 안 국장의 행적을 좇았다.
그리고 상부의 부당한 지시를 단호히 거부했던 한 공직자의 용기와 고뇌를 평전으로 형상화했다.
5·18 당시 전남경찰은 상부의 거듭된 유혈진압 지시에도 시민을 향해 총을 쏘지 않았다.
신군부의 무자비한 지시에 저항한 것이다.
하지만 경찰이 신군부의 쿠데타에 맞선 '그날'의 진실은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특히 는 신념으로 신군부의 강압적 지시를 거부함으로써 시민과 경찰의 생명을 지킨 안 국장의 이야기는 최근까지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저자는 안 국장이 남긴 마지막 유고인 '비망록'의 행간에 시간과 공간을 덧입힘으로써 1980년 5월의 진실을 경찰의 입장에서 생생하게 소환한다.
5·18 초기에 광주시민들은 계엄 확대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고, 일부 시민은 파출소에 돌을 던지는 등 시위를 진압하려는 경찰에게 불만을 표출했다.
당시 안 국장은 계엄군이 시위진압에 나설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 경찰이 평소보다 더 강하게 진압하도록 지시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럼에도 신군부는 일방적으로 공수부대를 투입해 인간사냥을 자행했고, 그 잔혹함에 경찰도 크게 놀랐다.
안 국장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시위를 진압하라는 상부의 압력에도 총과 실탄의 무장을 끝내 거부했다.
5월 21일, 공수부대가 비무장 시민들을 향해 발포해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시내에서 철수했으나 경찰은 시민들이 단 한 명도 다치지 않게 보호한 것이다.
이는 경찰과 시민의 깊은 신뢰로 이어졌다.
시민들은 더이상 경찰서를 파괴하지 않은 채 지켰을 뿐 아니라 ""경찰이 들어와서 시내 치안을 맡아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다음은 이와 관련한 박관현 당시 전남대 총학생회장의 증언-. 박 회장은 5월 15일 경찰국장실을 찾아 안 국장을 만났다.
"안병하 경찰국장의 반응은 우리의 예상을 훨씬 뛰어 넘었어요.
당시 안 국장은 우리의 제안에 대해 우호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도창 앞 집회를 평화적으로만 진행한다면 경찰이 적극 협조하겠다고 했어요.
"
저자는 신군부의 발포 명령에 따르지 않았던 안 국장의 소신과 행위를 2차 세계대전 당시 파리 주둔 독일군 사령관 디트리히 폰 콜티츠의 '불복종'에 비유한다.
히틀러는 독일군의 패색이 짙어지자 파리의 기념물과 주요 건물을 모조리 폭파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콜티츠는 명령을 거부함으로써 파리의 황폐화를 막았다.
안 국장의 명예회복을 위해 지난한 세월 동안 앞장선 이는 미망인 전임순 여사였다.
전 여사는 1993년 여름 5·18 광주민주화운동 피해신고센터에 남편의 명예회복을 신청해 피해자로 인정받았고, 안 국장의 유해는 2005년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경찰묘역에 안장됐다.
2017년 촛불혁명 이후 경찰청은 안 국장을 치안감으로 1계급 특진을 추서하며 제1호 '올해의 경찰영웅'으로 선정했고, 전남경찰청사에 흉상도 제막했다.
그리고 지난해 5월 17일엔 이곳에 안병하공원이 개장됐다.
저자는 전임순 여사의 증언을 토대로 5·18 당시 전두환 중앙정보부장 서리 겸 보안사령관이 극비리에 전남 도청을 방문했다고 구체적으로 밝힌다.
전두환 씨는 자신의 회고록과 재판 과정에서 당시 광주를 방문한 일이 없었고, 헬기 기총 사격도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따라서 미망인의 증언이 사실로 확인될 경우 그 자체만으로도 주목할 만하다고 저자는 덧붙인다.
이철우 5·18 기념재단 이사장은 추천사에서 "이 책은 '경찰 지휘관이 현장에서 바라본 5·18'이라는 새로운 시각을 보여준다"면서 "상부의 부당한 지시를 거부했던 한 공직자의 용기와 고뇌를 엿볼 수 있다.
진실이 세상에 알려지기까지 많은 오해와 편견을 극복한 유족의 끈질긴 명예회복 노력도 눈여겨볼 만하다"고 말한다.
정한책방. 340쪽. 1만8천원. /연합뉴스
5·18 당시 전두환씨의 광주 방문 사실도 밝혀 주목
광주민주화운동이 막바지를 향해 치닫던 1980년 5월 25일, 최규하 대통령은 광주를 방문해 성명서를 발표했다.
계엄군의 도청 진압 작전을 앞둔 이때, 대통령을 수행한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안병하 전남 경찰국장에게 무기를 들고 앞장서 시내로 진입하라고 압박했다.
"경찰은 시민군의 형제, 가족도 있을 테고 이웃도 있는데 경찰이 어떻게 시민들에게 무기를 사용하면서 진압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
안 경찰국장의 대답은 단호했다.
대통령 앞에서 계엄사령관의 유혈 진압, 즉 발포 지시를 일거에 거부해버린 것이다.
계엄군은 초기부터 시민들을 '폭도'이자 섬멸의 대상인 '적'으로 규정했다.
경찰도 이같이 인식하고 앞장서라고 강요했다.
이를 일언지하에 뿌리친 안 경찰국장은 곧바로 계엄사 합동수사본부로 압송돼 8일간 혹독한 고문에 시달려야 했다.
그 후유증으로 8년 동안 투병하다가 1988년 60세 나이로 타계했다.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일을 앞두고 5·18을 경찰의 시각에서 새롭게 조명한 '안병하 평전'이 출간됐다.
5월 항쟁 당시 시민군의 일원으로 전남도청 상황실에서 활동했던 이재의 5·18기념재단 비상임연구위원이 그 저자다.
저자는 광주시민의 목소리를 담은 5·18의 최초 기록물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초고 집필자이기도 하다.
이 위원은 자료와 증언을 바탕으로 1980년 5월 17일부터 전남도청 최종 진압작전 하루 전인 26일까지 안 국장의 행적을 좇았다.
그리고 상부의 부당한 지시를 단호히 거부했던 한 공직자의 용기와 고뇌를 평전으로 형상화했다.
5·18 당시 전남경찰은 상부의 거듭된 유혈진압 지시에도 시민을 향해 총을 쏘지 않았다.
신군부의 무자비한 지시에 저항한 것이다.
하지만 경찰이 신군부의 쿠데타에 맞선 '그날'의 진실은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특히 는 신념으로 신군부의 강압적 지시를 거부함으로써 시민과 경찰의 생명을 지킨 안 국장의 이야기는 최근까지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저자는 안 국장이 남긴 마지막 유고인 '비망록'의 행간에 시간과 공간을 덧입힘으로써 1980년 5월의 진실을 경찰의 입장에서 생생하게 소환한다.
5·18 초기에 광주시민들은 계엄 확대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고, 일부 시민은 파출소에 돌을 던지는 등 시위를 진압하려는 경찰에게 불만을 표출했다.
당시 안 국장은 계엄군이 시위진압에 나설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 경찰이 평소보다 더 강하게 진압하도록 지시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럼에도 신군부는 일방적으로 공수부대를 투입해 인간사냥을 자행했고, 그 잔혹함에 경찰도 크게 놀랐다.
안 국장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시위를 진압하라는 상부의 압력에도 총과 실탄의 무장을 끝내 거부했다.
5월 21일, 공수부대가 비무장 시민들을 향해 발포해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시내에서 철수했으나 경찰은 시민들이 단 한 명도 다치지 않게 보호한 것이다.
이는 경찰과 시민의 깊은 신뢰로 이어졌다.
시민들은 더이상 경찰서를 파괴하지 않은 채 지켰을 뿐 아니라 ""경찰이 들어와서 시내 치안을 맡아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다음은 이와 관련한 박관현 당시 전남대 총학생회장의 증언-. 박 회장은 5월 15일 경찰국장실을 찾아 안 국장을 만났다.
"안병하 경찰국장의 반응은 우리의 예상을 훨씬 뛰어 넘었어요.
당시 안 국장은 우리의 제안에 대해 우호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도창 앞 집회를 평화적으로만 진행한다면 경찰이 적극 협조하겠다고 했어요.
"
저자는 신군부의 발포 명령에 따르지 않았던 안 국장의 소신과 행위를 2차 세계대전 당시 파리 주둔 독일군 사령관 디트리히 폰 콜티츠의 '불복종'에 비유한다.
히틀러는 독일군의 패색이 짙어지자 파리의 기념물과 주요 건물을 모조리 폭파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콜티츠는 명령을 거부함으로써 파리의 황폐화를 막았다.
안 국장의 명예회복을 위해 지난한 세월 동안 앞장선 이는 미망인 전임순 여사였다.
전 여사는 1993년 여름 5·18 광주민주화운동 피해신고센터에 남편의 명예회복을 신청해 피해자로 인정받았고, 안 국장의 유해는 2005년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경찰묘역에 안장됐다.
2017년 촛불혁명 이후 경찰청은 안 국장을 치안감으로 1계급 특진을 추서하며 제1호 '올해의 경찰영웅'으로 선정했고, 전남경찰청사에 흉상도 제막했다.
그리고 지난해 5월 17일엔 이곳에 안병하공원이 개장됐다.
저자는 전임순 여사의 증언을 토대로 5·18 당시 전두환 중앙정보부장 서리 겸 보안사령관이 극비리에 전남 도청을 방문했다고 구체적으로 밝힌다.
전두환 씨는 자신의 회고록과 재판 과정에서 당시 광주를 방문한 일이 없었고, 헬기 기총 사격도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따라서 미망인의 증언이 사실로 확인될 경우 그 자체만으로도 주목할 만하다고 저자는 덧붙인다.
이철우 5·18 기념재단 이사장은 추천사에서 "이 책은 '경찰 지휘관이 현장에서 바라본 5·18'이라는 새로운 시각을 보여준다"면서 "상부의 부당한 지시를 거부했던 한 공직자의 용기와 고뇌를 엿볼 수 있다.
진실이 세상에 알려지기까지 많은 오해와 편견을 극복한 유족의 끈질긴 명예회복 노력도 눈여겨볼 만하다"고 말한다.
정한책방. 340쪽. 1만8천원.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