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왕과 시민과 야생동물의 쉼터 동구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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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쓱-싹-, 쓱-싹-".
진달래, 개나리, 벚꽃, 산수유 고운 봄날 조선 태조 이성계 무덤에 난 억새를 베는 낫 소리에는 600년 역사의 울림이 깃들어 있었다.
태조가 잠든 건원릉은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조선 왕릉군 동구릉에서도 가장 높고, 산세가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 태조 이성계 묘의 억새 베기, 청완예초
1392년 조선 왕조를 연 태조는 1408년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고향인 함경도 함흥 땅에 묻히길 바랐다.
그러나 왕릉은 도성에서 10리 밖, 100리 안에 위치해야 한다는 왕실 정책에 따라 그 바람은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조선은 능 행차로 국왕이 수도를 오래 비우면 안 된다고 판단해 도성에서 너무 먼 곳에는 능을 조성하지 않았다.
고향에 묻히지 못하자 태종은 함흥 땅의 억새를 꺾어와 봉분에 심게 했다.
억새가 듬성듬성해지자 씨를 받아 심어 다시 무성하게 만들었고 매년 한식에 능을 손질했다.
2009년 조선왕릉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후 문화재청은 이런 전통을 살려 한식에 건원릉 억새 베기 작업인 '청완예초'를 시민공개 행사로 해왔다.
건원릉 예초는 1년에 딱 한 번 한다.
청완은 푸른 억새라는 뜻이다.
다른 곳의 억새를 이식한 적 없고, 봉분의 억새에서 받은 씨를 다시 뿌려 키웠으니 건원릉 억새의 원산지는 여전히 북한 함흥일 것이다.
남한에서 유일한 북한 함경도산 억새, 바람 불면 태조의 향수를 북쪽으로 실어 보내는 건원릉 억새는 남북통일을 손꼽아 기다릴지 모르겠다.
올해 청완예초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우려 때문에 비공개로 간소하게 치러졌다.
조선왕릉동부지구관리소 직원들끼리 풀베기 작업만 했다.
정식으로 공개되지 않았지만 몇몇 시민들은 먼발치서 작업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봤다.
시민들이 가까이할 수 없었던 청완예초. 아쉬움이 컸다.
조선 왕릉의 다른 봉분에는 모두 잔디가 심겨 있다.
억새 봉분은 건원릉이 유일하다.
키 크고 누렇게 변한 억새가 무성한 건원릉은 잔디 봉분처럼 단정하진 않았지만, 더 위엄 있어 보였다.
소박해서인지 친숙하게도 느껴졌다.
태조의 삶은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다.
<백운봉에 올라>
손당겨 댕댕이덩굴 휘어잡고
푸른 봉우리에 오르니
한 암자가 흰구름 속에 높이
누워 있네
만약에 눈에 들어오는 세상을
내 땅으로 만든다면
초나라 월나라 강남인들 어찌
받아들이지 않으리
이성계가 지은 시다.
백운봉은 북한산 백운대를 말한다.
북한산에 올라 중국 땅까지 넘본 기개가 장대하다.
해가 갈수록 청완예초 행사에 참여하겠다는 시민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역사적 사건과 인간적 고뇌가 뒤엉킨 태조의 삶이 흥미로운 건 당연할 게다.
내년에는 시민과 함께 하는 억새 베기가 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해졌다.
◇ 왕과 시민의 휴식처, 야생동물의 놀이터, 동구릉
동구릉은 서울 동쪽에 조선 왕과 왕비의 능 9기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서울 가까이 서오릉, 서삼릉 등 다른 왕릉군도 있지만, 동구릉은 조선 왕실 최대 규모의 왕릉군이다.
조선 왕조의 성지다.
동구릉에서는 조선 역사와 문화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전체 능역이 약 200만 ㎡에 달해 넓은 땅과 푸른 숲이 장관이다.
숲에는 고라니가 뛰놀고, 멧돼지가 배회하고, 개울에는 왜가리가 물고기를 잡아먹고, 나뭇가지 사이로 온갖 새소리가 들리는 야생동물의 천국이기도 하다.
취재진은 이틀 동안 고라니 7마리와 마주쳤다.
양묘장에서 만난 호기심 많은 놈은 우리를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봤다.
카메라를 들이대자 우아하면서도 힘차게 다리를 박차며 숲속으로 쏜살같이 달아났다.
아침나절 맞닥뜨린 왜가리, 백로, 다람쥐들도 사람이 무섭지 않은지 도망가지 않고 한동안 제자리에 있었다.
조선왕조 519년이 잠들어있는 동구릉은 왕과 왕후의 안식처일 뿐 아니라 일상에 지친 시민에게 위로를 주는 휴식처이기도 하다.
코로나 위기가 지속한 4월 첫 주말에도 시민들은 가족, 연인과 함께 동구릉을 찾았다.
마스크를 끼고, 손 소독을 하면서 산책하거나 담소를 나누는 모습에서 마음의 여유를 느낄 수 있었다.
산책로 옆에는 제기차기, 오목, 공기놀이, 투호(화살 던지기) 등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그곳에서 들리는 어른, 아이의 뒤섞인 웃음소리만으로도 힐링이 된다.
올해 동구릉 방문객은 지난 3월 말까지 작년 대비 60%가 증가했다.
주말에는 2천여명이 방문한다.
문화재청은 코로나 사태를 이길 수 있게 시민에게 휴식 공간을 제공하면서도 철저한 방역수칙 준수를 유도하고 있었다.
좁은 숲길이나 등산로와 달리 동구릉은 길이 넓고 탁 트인 공간이 많아 방문객들은 서로 멀리 떨어져 걸었다.
역사와 힐링의 공간인 동구릉의 매력에 빠진 시민들의 방문 행렬은 코로나 사태가 끝나도 쉬이 끊길 것 같지 않다.
조선 왕족의 무덤은 모두 120기에 이른다.
능(陵) 42기, 원(園) 14기, 묘(墓) 64기다.
조선 왕족 무덤은 무덤 주인에 따라 명칭이 다르다.
능은 왕과 왕비의 무덤이다.
원은 왕세자와 왕세자빈의 무덤을 말한다.
그 외 왕족 무덤은 일반인의 무덤과 같이 묘라고 했다.
능 42기 중 40기가 남한에 있다.
태조 원비 신의왕후의 능, 정종과 정안왕후의 능 등 2기는 북한 개성에 있다.
동구릉에는 왕 7명, 왕비 10명이 잠들어 있다.
1기는 합장릉이어서 봉분은 16개다.
능은 봉분이 하나인 단릉, 왕과 왕후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쌍능, 왕과 왕후를 하나의 봉분에 묻은 합장능, 왕과 두 명의 왕후 봉분 3기를 나란히 조성한 삼연릉 등 다양한 유형이 있다.
이는 능과 주변 자연지형을 어우러지게 하려는 노력의 산물이기도 하다.
동구릉에 안식한 조선 왕과 왕비는 태조 외 5대 문종·현덕왕후(현릉), 14대 선조·첫째 부인 의인왕후·둘째 부인 인목왕후(목릉),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휘릉), 18대 현종·명성왕후(숭릉), 20대 경종 부인 단의왕후(혜릉), 21대 영조·둘째 부인 정순왕후(원릉), 24대 헌종·첫째 부인 효현왕후·둘째 부인 효정왕후(경릉), 추존 문조·신정왕후(수릉)다.
(※괄호 안은 왕과 왕비가 묻힌 능의 이름)
동구릉을 거닐다 보면 역사와 친숙하게 된다.
이유 없는 무덤 없다는 말이 동구릉만큼 딱 들어맞는 곳이 있을까.
능의 주인들은 저마다 특별한 이야기를 갖고 있다.
단종의 어머니였기에 폐위됐다 복원된 현덕왕후, 비운의 영창대군 어머니 인목왕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봉림대군(효종)의 아들로 조선 왕 중 유일하게 타국 청나라에서 태어난 현종, 영조의 계비로 수렴청정을 하며 권력을 누렸던 정순왕후, 조선 후기 정국을 주도했던 '조대비' 신정왕후 등 시대의 주인공이었거나, 역사의 수레바퀴 밑에서 비극적 삶을 산 인물들이 이곳에 잠들어 있다.
그 사연을 짚어가다 보면 한국사의 큰 줄기와 만나게 된다.
동구릉은 한두 번 방문하고 말 문화유산이 아니다.
동구릉 이야기가 곧 우리 역사다.
우리의 과거로 안내하는 관문이다.
◇ 한 왕실의 모든 왕릉 보존, 세계사에 유일
지구촌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꼽히는 프랑스 파리와 체코 프라하. 2차 대전의 무자비한 폭격을 모면하고 살아남았다.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라고 하는 이 시들의 보존을 세계인이 안도하고 축하한다.
우리에게도 파리, 프라하 못지않게 보호하려고 애썼고 보존에 성공한 문화유산이 있다.
바로 조선 왕릉이다.
왕조가 500년 넘게 이어졌고 모든 왕과 왕비의 능이 온전하게 남아 있는 사례는 세계에서 조선이 유일하다.
이집트 피라미드는 물론, 중국 명나라 황제 17명 중 13명이 묻힌 명십삼릉도 대부분 도굴되거나 훼손됐다.
이는 조선 창건 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끈질기고 강력한 보존 노력 때문이다.
조선은 조상에 대한 존경과 숭모를 중요한 가치로 여겨 역대 왕과 왕비의 능을 엄격히 관리했다.
그 결과 42기 능 중 어느 하나 훼손되거나 인멸되지 않고 모두 제자리에 완전하게 보존돼 있다.
조선 건국 후 지금까지 600년 동안 이어진 보존 노력과 성공은 절대 쉽지 않은 위업이다.
체계적이고 통합적이면서 엄격한 관리 결과 조선왕릉은 원형이 보존됐다.
자부심을 가져도 될 것 같다.
유네스코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했으니 조선왕릉 보존의 가치는 세계가 인정한 셈이다.
동구릉 형식과 외관에서는 조선의 건축 문화, 예술관, 시대사상을 읽을 수 있다.
태조를 안장한 1408년부터 효정왕후를 묻은 1904년까지, 496년 동안 9개의 능이 조성됐던 동구릉은 조선 왕릉의 변천사를 보여준다.
왕권이 강력했던 초기 왕릉인 건원릉이 가장 장중한 느낌을 준다.
후기로 내려올수록 왕릉은 단순하고 소박해진다.
원래 조선왕릉은 유교 위민사상에 따라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다.
숙종은 왕릉 조성과 관리에 드는 백성의 수고를 덜기 위해 능 장식을 더 간소히 하라고 명령하기도 했다.
절대 왕권을 과시하기 위해 국왕 무덤을 크게 만들었던 일반적인 세계사 흐름과 다른 특징이다.
문화재청은 코로나 사태 때문에 잠시 중단했지만, 왕릉 숲길 개방을 확대할 예정이다.
시민에게 가깝고 힐링을 주는 공간 왕릉, 역사를 성찰하는 시민, 멋진 일이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0년 5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연합뉴스
진달래, 개나리, 벚꽃, 산수유 고운 봄날 조선 태조 이성계 무덤에 난 억새를 베는 낫 소리에는 600년 역사의 울림이 깃들어 있었다.
태조가 잠든 건원릉은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조선 왕릉군 동구릉에서도 가장 높고, 산세가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 태조 이성계 묘의 억새 베기, 청완예초
1392년 조선 왕조를 연 태조는 1408년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고향인 함경도 함흥 땅에 묻히길 바랐다.
그러나 왕릉은 도성에서 10리 밖, 100리 안에 위치해야 한다는 왕실 정책에 따라 그 바람은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조선은 능 행차로 국왕이 수도를 오래 비우면 안 된다고 판단해 도성에서 너무 먼 곳에는 능을 조성하지 않았다.
고향에 묻히지 못하자 태종은 함흥 땅의 억새를 꺾어와 봉분에 심게 했다.
억새가 듬성듬성해지자 씨를 받아 심어 다시 무성하게 만들었고 매년 한식에 능을 손질했다.
2009년 조선왕릉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후 문화재청은 이런 전통을 살려 한식에 건원릉 억새 베기 작업인 '청완예초'를 시민공개 행사로 해왔다.
건원릉 예초는 1년에 딱 한 번 한다.
청완은 푸른 억새라는 뜻이다.
다른 곳의 억새를 이식한 적 없고, 봉분의 억새에서 받은 씨를 다시 뿌려 키웠으니 건원릉 억새의 원산지는 여전히 북한 함흥일 것이다.
남한에서 유일한 북한 함경도산 억새, 바람 불면 태조의 향수를 북쪽으로 실어 보내는 건원릉 억새는 남북통일을 손꼽아 기다릴지 모르겠다.
올해 청완예초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우려 때문에 비공개로 간소하게 치러졌다.
조선왕릉동부지구관리소 직원들끼리 풀베기 작업만 했다.
정식으로 공개되지 않았지만 몇몇 시민들은 먼발치서 작업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봤다.
시민들이 가까이할 수 없었던 청완예초. 아쉬움이 컸다.
조선 왕릉의 다른 봉분에는 모두 잔디가 심겨 있다.
억새 봉분은 건원릉이 유일하다.
키 크고 누렇게 변한 억새가 무성한 건원릉은 잔디 봉분처럼 단정하진 않았지만, 더 위엄 있어 보였다.
소박해서인지 친숙하게도 느껴졌다.
태조의 삶은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다.
<백운봉에 올라>
손당겨 댕댕이덩굴 휘어잡고
푸른 봉우리에 오르니
한 암자가 흰구름 속에 높이
누워 있네
만약에 눈에 들어오는 세상을
내 땅으로 만든다면
초나라 월나라 강남인들 어찌
받아들이지 않으리
이성계가 지은 시다.
백운봉은 북한산 백운대를 말한다.
북한산에 올라 중국 땅까지 넘본 기개가 장대하다.
해가 갈수록 청완예초 행사에 참여하겠다는 시민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역사적 사건과 인간적 고뇌가 뒤엉킨 태조의 삶이 흥미로운 건 당연할 게다.
내년에는 시민과 함께 하는 억새 베기가 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해졌다.
◇ 왕과 시민의 휴식처, 야생동물의 놀이터, 동구릉
동구릉은 서울 동쪽에 조선 왕과 왕비의 능 9기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서울 가까이 서오릉, 서삼릉 등 다른 왕릉군도 있지만, 동구릉은 조선 왕실 최대 규모의 왕릉군이다.
조선 왕조의 성지다.
동구릉에서는 조선 역사와 문화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전체 능역이 약 200만 ㎡에 달해 넓은 땅과 푸른 숲이 장관이다.
숲에는 고라니가 뛰놀고, 멧돼지가 배회하고, 개울에는 왜가리가 물고기를 잡아먹고, 나뭇가지 사이로 온갖 새소리가 들리는 야생동물의 천국이기도 하다.
취재진은 이틀 동안 고라니 7마리와 마주쳤다.
양묘장에서 만난 호기심 많은 놈은 우리를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봤다.
카메라를 들이대자 우아하면서도 힘차게 다리를 박차며 숲속으로 쏜살같이 달아났다.
아침나절 맞닥뜨린 왜가리, 백로, 다람쥐들도 사람이 무섭지 않은지 도망가지 않고 한동안 제자리에 있었다.
조선왕조 519년이 잠들어있는 동구릉은 왕과 왕후의 안식처일 뿐 아니라 일상에 지친 시민에게 위로를 주는 휴식처이기도 하다.
코로나 위기가 지속한 4월 첫 주말에도 시민들은 가족, 연인과 함께 동구릉을 찾았다.
마스크를 끼고, 손 소독을 하면서 산책하거나 담소를 나누는 모습에서 마음의 여유를 느낄 수 있었다.
산책로 옆에는 제기차기, 오목, 공기놀이, 투호(화살 던지기) 등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그곳에서 들리는 어른, 아이의 뒤섞인 웃음소리만으로도 힐링이 된다.
올해 동구릉 방문객은 지난 3월 말까지 작년 대비 60%가 증가했다.
주말에는 2천여명이 방문한다.
문화재청은 코로나 사태를 이길 수 있게 시민에게 휴식 공간을 제공하면서도 철저한 방역수칙 준수를 유도하고 있었다.
좁은 숲길이나 등산로와 달리 동구릉은 길이 넓고 탁 트인 공간이 많아 방문객들은 서로 멀리 떨어져 걸었다.
역사와 힐링의 공간인 동구릉의 매력에 빠진 시민들의 방문 행렬은 코로나 사태가 끝나도 쉬이 끊길 것 같지 않다.
조선 왕족의 무덤은 모두 120기에 이른다.
능(陵) 42기, 원(園) 14기, 묘(墓) 64기다.
조선 왕족 무덤은 무덤 주인에 따라 명칭이 다르다.
능은 왕과 왕비의 무덤이다.
원은 왕세자와 왕세자빈의 무덤을 말한다.
그 외 왕족 무덤은 일반인의 무덤과 같이 묘라고 했다.
능 42기 중 40기가 남한에 있다.
태조 원비 신의왕후의 능, 정종과 정안왕후의 능 등 2기는 북한 개성에 있다.
동구릉에는 왕 7명, 왕비 10명이 잠들어 있다.
1기는 합장릉이어서 봉분은 16개다.
능은 봉분이 하나인 단릉, 왕과 왕후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쌍능, 왕과 왕후를 하나의 봉분에 묻은 합장능, 왕과 두 명의 왕후 봉분 3기를 나란히 조성한 삼연릉 등 다양한 유형이 있다.
이는 능과 주변 자연지형을 어우러지게 하려는 노력의 산물이기도 하다.
동구릉에 안식한 조선 왕과 왕비는 태조 외 5대 문종·현덕왕후(현릉), 14대 선조·첫째 부인 의인왕후·둘째 부인 인목왕후(목릉),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휘릉), 18대 현종·명성왕후(숭릉), 20대 경종 부인 단의왕후(혜릉), 21대 영조·둘째 부인 정순왕후(원릉), 24대 헌종·첫째 부인 효현왕후·둘째 부인 효정왕후(경릉), 추존 문조·신정왕후(수릉)다.
(※괄호 안은 왕과 왕비가 묻힌 능의 이름)
동구릉을 거닐다 보면 역사와 친숙하게 된다.
이유 없는 무덤 없다는 말이 동구릉만큼 딱 들어맞는 곳이 있을까.
능의 주인들은 저마다 특별한 이야기를 갖고 있다.
단종의 어머니였기에 폐위됐다 복원된 현덕왕후, 비운의 영창대군 어머니 인목왕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봉림대군(효종)의 아들로 조선 왕 중 유일하게 타국 청나라에서 태어난 현종, 영조의 계비로 수렴청정을 하며 권력을 누렸던 정순왕후, 조선 후기 정국을 주도했던 '조대비' 신정왕후 등 시대의 주인공이었거나, 역사의 수레바퀴 밑에서 비극적 삶을 산 인물들이 이곳에 잠들어 있다.
그 사연을 짚어가다 보면 한국사의 큰 줄기와 만나게 된다.
동구릉은 한두 번 방문하고 말 문화유산이 아니다.
동구릉 이야기가 곧 우리 역사다.
우리의 과거로 안내하는 관문이다.
◇ 한 왕실의 모든 왕릉 보존, 세계사에 유일
지구촌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꼽히는 프랑스 파리와 체코 프라하. 2차 대전의 무자비한 폭격을 모면하고 살아남았다.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라고 하는 이 시들의 보존을 세계인이 안도하고 축하한다.
우리에게도 파리, 프라하 못지않게 보호하려고 애썼고 보존에 성공한 문화유산이 있다.
바로 조선 왕릉이다.
왕조가 500년 넘게 이어졌고 모든 왕과 왕비의 능이 온전하게 남아 있는 사례는 세계에서 조선이 유일하다.
이집트 피라미드는 물론, 중국 명나라 황제 17명 중 13명이 묻힌 명십삼릉도 대부분 도굴되거나 훼손됐다.
이는 조선 창건 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끈질기고 강력한 보존 노력 때문이다.
조선은 조상에 대한 존경과 숭모를 중요한 가치로 여겨 역대 왕과 왕비의 능을 엄격히 관리했다.
그 결과 42기 능 중 어느 하나 훼손되거나 인멸되지 않고 모두 제자리에 완전하게 보존돼 있다.
조선 건국 후 지금까지 600년 동안 이어진 보존 노력과 성공은 절대 쉽지 않은 위업이다.
체계적이고 통합적이면서 엄격한 관리 결과 조선왕릉은 원형이 보존됐다.
자부심을 가져도 될 것 같다.
유네스코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했으니 조선왕릉 보존의 가치는 세계가 인정한 셈이다.
동구릉 형식과 외관에서는 조선의 건축 문화, 예술관, 시대사상을 읽을 수 있다.
태조를 안장한 1408년부터 효정왕후를 묻은 1904년까지, 496년 동안 9개의 능이 조성됐던 동구릉은 조선 왕릉의 변천사를 보여준다.
왕권이 강력했던 초기 왕릉인 건원릉이 가장 장중한 느낌을 준다.
후기로 내려올수록 왕릉은 단순하고 소박해진다.
원래 조선왕릉은 유교 위민사상에 따라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다.
숙종은 왕릉 조성과 관리에 드는 백성의 수고를 덜기 위해 능 장식을 더 간소히 하라고 명령하기도 했다.
절대 왕권을 과시하기 위해 국왕 무덤을 크게 만들었던 일반적인 세계사 흐름과 다른 특징이다.
문화재청은 코로나 사태 때문에 잠시 중단했지만, 왕릉 숲길 개방을 확대할 예정이다.
시민에게 가깝고 힐링을 주는 공간 왕릉, 역사를 성찰하는 시민, 멋진 일이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0년 5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