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티에씨, 1965년 인천서 발견돼 5년뒤 스웨덴行…어렴풋이 위탁부모 기억
스웨덴 입양한인 "50년 전 사라진 정체성 찾고 싶어요"
"50년 전 저에게서 사라진 정체성을 이제는 찾고 싶어요"
1970년 3월 31일 대여섯살 나이에 입양기관인 대한양연회(현 대한사회복지회)에서 스웨덴에 입양된 한인 로티에 국자 리(한국명 이국자) 씨가 뿌리를 찾고 있다.

로티에 씨는 최근 아동권리보장원 입양인지원센터에 보낸 사연에서 "결혼해 남편과 딸 셋을 낳아 잘 살고 있지만, 마음 한쪽에는 슬픔과 공허함이 자리 잡고 있다.

마치 제 마음속을 후벼 파는 것 같은 느낌"이라며 "친가족을 만나는 것은 저를 떠나지 않는 오랜 바람"이라고 애틋한 마음을 전했다.

"엄마의 사랑과 포옹이 그립다"는 그는 형제자매, 이모나 고모, 삼촌, 사촌들을 찾고 싶어한다.

친부모와 가족의 연을 이어보기 위해 45년 만인 2015년 모국땅을 처음 밟았던 로티에 씨는 동행한 딸들이 '당연히 친부모를 찾아야 한다.

그것은 엄마의 권리다'라는 격려에 고무돼 열심히 정체성을 회복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그동안 그가 입양기관 등을 다니며 모은 기록에 따르면, 날짜는 알 수 없지만, 인천 시민이 처음 발견해 인천시청 사회복지과에 넘겼고, 다시 1965년 9월 24일 인천시 남구 도화동에 있는 성광육아원(지금은 없어짐)에 보내졌다.

한국 이름 '이국자'를 이 보육원에서 지어줬고, 생년월일도 1963년 8월 20일 또는 1964년 8월 20일로 추정해 기록을 남겼다.

스웨덴으로 떠나기 전 그는 건설업자인 아버지(당시 45)와 어머니(43), 아들(17)이 사는 위탁 가정에 맡겨져 자랐다.

그러나 그 가정에 들어간 시기와 머문 기간을 알 수가 없다.

로티에 씨는 이 가정에서 지낼 때 오빠와 마당에서 뛰어놀고, 등에 업힌 기억을 어렴풋이 하고 있다.

성장하면서 이 오빠가 보고 싶었고, 너무 그리워서 양어머니에게 '오빠를 데려다 달라'고 울부짖으며 말했다고 했을 정도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잠시 맡아 길러준 위탁 부모와 아들도 찾고 있다.

그는 1969년 9월 25일 위탁 어머니와 함께 현 대한사회복지회 사무실에서 입양용 사진 촬영을 했고, '정성조 의원'에서 건강 검진도 했다.

이후 6개월 뒤 한국 아이를 먼저 입양한 스웨덴의 한 부부에게 맡겨졌다.

양아버지는 그가 행복하고, 부족함 없이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늘 열심히 일했다.

양어머니는 나이에 비해 딸이 체구가 작자 생년월일이 잘못됐다고 생각해 병원에 다니며 검진을 했고, 이후 생년월일을 '1965년 8월 20일'로 정정했다고 한다.

한국인 얼굴을 한 스웨덴 사람으로 살게 된 그는 정체성을 완전히 버리고 반항아처럼 성장했다고 털어놓았다.

'누구도 너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네가 버려졌고, 여기에 대해선 더는 말할 것이 없다.

지금의 너는 스웨덴에 사는 스웨덴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아라"라는 양어머니의 말은 지금도 비수처럼 가슴에 꽂혀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한국어는 물론 태어난 곳, 한국에 관한 모든 것을 버려야만 했다.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슬프고 화도 많이 났지만, 지금은 친어머니를 만나 품에 안겨 "정말 보고 싶었다"고 말하며 펑펑 울고 싶다고 말했다.

방황 탓에 고등학교 졸업도 못 한 그는 양아버지의 도움으로 17살 때 독립했다.

20살 때 스웨덴 남자를 만나 결혼해 세 아이를 두고 있다.

평범한 주부로 살던 그는 2012년부터 큰딸과 함께 친가족 찾기에 나섰다.

유전자 검사(23 and me)도 했고, 운이 좋게도 미국에서 육촌과 팔촌을 만나 교류하고 있다.

육촌인 박 윤(80) 씨는 1960년대 미국에 이민했고, 그는 자신의 친아버지와 닮았다고 로티에 씨는 전했다.

그는 "친어머니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아주 많다"며 "언젠가는 꼭 만나기를 바란다"고 소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