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라면 우리는 진짜를 선택해야 할까, 가짜를 선택해야 할까.

가짜가 진짜를 사칭했다고 가정할 때, 우리는 일단 진짜인 척한 가짜의 도덕성을 질타하겠지만, 그리고 나서는 깊은 상념과 회의에 빠질지도 모른다.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라면 가짜가 진짜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진짜를 판별하는 기준이 잘못된 것 아닌가.

가짜가 '더 진짜 같음'에도 불구하고 가짜여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우리는 가짜보다 못한 진짜를 진짜라는 이유로 믿고 있었는가.

[영화 속 그곳] 문신을 한 신부님
폴란드 출신 얀 코마사 감독의 '문신을 한 신부님'은 소년원 출신이 신부 행세를 하며, 진짜 신부보다 신부 역할을 더 잘 해낸다는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과 함께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 국제장편영화상 최종 후보에 올랐고, 폴란드 국내에서는 흥행성과 작품성의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

무엇보다 코미디 같은 소재지만, 간단치 않은 종교적·철학적 질문들을 쏟아낸다.

◇ 가톨릭 신부가 되고 싶은 다니엘
소년원에 수감 중인 스무살 청년 다니엘은 가톨릭 신부가 되고 싶었다.

출소해 어느 마을 목공소에 일자리를 얻게 된 그는 우연히 들린 마을 성당에서 엉겁결에 신부 행세를 하게 된다.

앞에 앉은 엘리자에게 미사 정보를 물어봤지만, 차가운 반응에 그만 오기가 발동했고, 훔친 사제복을 보여주면서 자신이 신부라고 거짓말을 하게 된 것이다.

엘리자의 소개로 성당의 주임 신부를 만난 다니엘은 때마침 주임신부가 병원 치료를 위해 마을을 비운 사이 그 대신 성당 일을 맡게 된다.

문제는 여기부터다.

[영화 속 그곳] 문신을 한 신부님
다니엘은 가짜 신부 행각이 들통나기는커녕 파격적이고 도발적이지만, 진짜 신부보다 더 신부다운 언행으로 오히려 마을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

신부 행세 중에 다니엘은 마을 주민 7명이 숨진 비극적인 교통사고에 대해 듣게 된다.

사고의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바뀌어 있으며, 마을 외부인을 가해자로 만들기 위해 사고의 진실이 은폐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사고 은폐에 마을의 정치적 권력을 가진 시장이 개입됐고 주임 신부마저 이에 침묵해온 상황에서 다니엘은 문제 해결에 나선다.

가짜 신부 다니엘은 왜곡된 정의를 바로 세울 수 있을까.

그에겐 과연 그럴 자격이 있는 걸까.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폴란드에서 약 3개월 동안 신부를 사칭한 한 소년의 이야기가 매스컴에 대서특필된 적이 있다.

성직자가 되고 싶었던 이 소년은 결혼식과 세례식, 장례식 등을 집전했다.

실제로도 이 가짜 신부는 전임자였던 진짜 신부보다 모든 면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여줬다.

소년은 전통적인 교리를 따르지 않는 방식으로 신도들에게 다가갔고, 그런 점이 오히려 신도들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영화 속 그곳] 문신을 한 신부님
◇ 우리 안에 공존하는 선과 악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의 이야기는 우리 주변에 널려 있다.

예전 한 TV 프로그램에서는 유명 가수와 그 가수의 창법을 흉내 내는 모창 도전자들이 뒤섞여 커튼 뒤에서 차례로 노래를 부르고 청중들은 그중 '진짜 가수'를 골라냈다.

그런데 우습게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가짜를 진짜로, 진짜를 가짜로 선택한다.

심지어는 진짜 가수가 다수로부터 가짜로 지목돼 탈락하기도 한다.

진짜를 진짜로, 가짜를 가짜로 판별하는 것은 정당한 인식 작용에 속한다.

그러나 진짜에서 '진짜다움'을, 가짜에서 '가짜다움'을 유추하는 것은 '고정관념'이 하는 일이다.

따라서 신부에게서 신부다움을, 전과자에게서 전과자다움을 판단하는 일이야말로 과잉된 일반화이자, 부정확한 사회적 지각일 수 있다.

영화 제목에서 예측할 수 있겠지만, 가짜 신부 다니엘은 결국 신도들에게 사제복 안, 자신의 몸에 새겨진 문신을 보여줌으로써 가짜 신부와 이를 믿는 신도 간에 형성된 신뢰-기망의 긴장 관계를 일순간 무너뜨린다.

사제복 안 문신이 노출되는 이 문제적 장면이야말로 성(聖)과 속(俗)의 분리 장벽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드러내면서 1인 역할극의 종료를 알린다.

신도들은 사제복과 문신이 한 몸에 구현된 모습에서 충격과 함께 한 인격체 안에 선과 악이 너무도 쉽게 공존할 수 있음을 새삼스럽게 깨닫고 놀라게 될지 모른다.

물론 그 이후 다니엘을 보는 신도들의 시각이 사제복과 문신 중 어떤 것에 의지하게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영화 속 그곳] 문신을 한 신부님
◇ 비극적 역사의 그림자
영화에서 다니엘의 교통사고 개입은 '종교의 정치 참여'라는 문제에 시사적이다.

주임 신부가 무관심했던 '사회적 정의'를 가짜 신부가 실현하려 한다는 것은 영화가 설정한 '신부다움'에 '참여'가 포함돼 있음을 의미한다.

다니엘은 교통사고에 대해 다수의 마을 구성원이 아닌 소수의 외부인에 관심을 둔다.

힘이 약하고 소외된 자가 피해자였을 가능성을 생각한다.

그는 진실의 은폐와 다수의 침묵에 저항했다.

이로써 그는 분명하게 보여줬다.

'참여'란 종교 집단의 정치 권력화도, 부당한 정치 권력에 대한 복종도 아닌, 소외된 자들의 편에서 정의와 평등의 실현에 목소리를 내는 것임을.
이 영화는 폴란드 남동쪽 슬로바키아와의 국경 부근에 있는 작은 마을 '야스리스카'(Jasliska)에서 찍었다.

폴란드는 그리스 정교를 믿는 많은 동유럽 국가와 달리 인구의 90%가 가톨릭 신자인 유럽의 대표적인 가톨릭 국가다.

독일과 러시아 사이에서 오랜 세월 외세의 침략에 시달려온 탓인지 독실한 신자들이 많다.

야스리스카는 매우 작은 마을이지만, 유대인 대학살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불행한 역사를 갖고 있다.

1941년 1천명이 안 되는 마을 인구 중 330명이 유대인이었지만, 나치의 대학살 광풍이 몰아친 이후 불과 10여명만이 살아남았다.

영화에서 이주 주민이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둔갑한 교통사고 이야기 뒤에는 이 마을 유대인이 겪었던 비극적 역사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역사 속 가톨릭과 유대인의 오랜 반목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영화 속 그곳] 문신을 한 신부님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0년 4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