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영 영일화성 회장이 인천 가좌동 본사에서 미래 경영계획을 설명하고 있다.
김종영 영일화성 회장이 인천 가좌동 본사에서 미래 경영계획을 설명하고 있다.
칠십을 고희(古稀)라고 한다. 이쯤 되면 대개 의욕이 줄어들게 마련이다. 하지만 더 의욕적으로 도전에 나서는 기업인들이 있다. 김종영 영일화성 회장(87)은 41년째 화학업체를 경영하며 작지만 강한 기업을 키워냈다. 그는 70대 중반 대학에 입학해 80대 중반에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 기간에 네 권의 전문서적도 집필했다.
김종영 영일화성 회장은 1933년생이다. 그가 고희를 넘겨 도전한 내용은 놀라울 정도다. 고졸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그는 공부에 맺힌 한을 풀기 위해 75세에 숭실대에 입학했다. 내친 김에 석사를 거쳐 80대 중반에 박사학위를 땄다. 10년 동안 학사·석사·박사 과정을 마쳤다. 네 권(일부는 공저)의 저서도 집필했다. 기업경영과 공부, 저술 등 세 마리 토끼를 잡은 셈이다.

김종영 영일화성 회장 "10년 뒤 소비자가 뭘 찾을까, 매일 고민…발명특허 17건"
저술은 전문서적 범주에 들어갈 정도다. 78세에 《규산염의 제조와 용도》를 출간했다. 국내에 전문 기술서적이 없어 연구원들이 불편을 겪자 펴낸 것이다. 81세엔 《규산염의 응용과 용도》를 출판했다. 규산염(silicate)을 원료로 하는 가공제품에 관한 기술서적이다. 84세엔 《장수기업으로 가는 길》이라는 경영학서적을 냈다. 자신의 사업경험과 박사과정 공부를 토대로 지속경영방법을 제시한 책이다. 86세엔 《창업에서 장수기업으로》라는 책자를 출간했다. 김 회장은 “경제성장을 위해선 벤처창업, 기술·경험을 보유한 시니어 창업, 기존 사업에 새로운 업종을 추가하는 창업이 균형을 이룰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종영 회장은 늘 작업복 차림으로 공장을 누빈다. 인천 가좌동에 있는 영일화성은 3300㎡ 규모 부지에 지어진 화학제품 생산업체다. 대표 제품은 가용성규산염, 콜로이달 실리카졸, 폴리초산비닐(PVAc) 접착제 등이다. 가용성규산염(일명 물유리)은 토목, 건축, 주조, 제지, 세라믹, 내화물 제품들의 원재료 및 결합재로 사용된다. 코로이달 실리카졸은 정밀주조, 내화물, 세라믹, 도료 등에 들어간다. 폴리초산비닐 접착제는 목가공 및 지류 접착제 등으로 공급된다.

김 회장은 “우리는 1979년 창업 이후 2008년 원자재 파동기에 단 한번 적자를 냈을 뿐 항상 흑자를 냈다”고 말했다. 종업원은 20명의 작은 기업이지만 호두알 같은 기업을 일궈온 셈이다. 여기엔 몇 가지 비결이 있다.

첫째, 일등기업을 향한 비전과 경영관이다. 군에서 제대한 뒤 1962년 규산염 제조공장에 공원으로 입사했다. 불과 4년 만에 공장장으로 승진했다. 핵심시설인 용해로의 구조를 개선해 연료소비를 절감했고, 노(furnace) 수명을 연장시키는 등 현장에서의 업무능력을 인정받은 데 따른 것이다. 김 회장은 “일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기업이 요구하기 전에 스스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관심을 두고 생각하는 것”이라며 “그래야 문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 뒤 몇몇 기업을 거쳐 46세인 1979년 영일화성을 창업했다. 강소기업을 만들어보겠다는 소망으로 자신의 이름을 따 상호를 지었다. 그는 “기업 경쟁력은 현장에서 생긴다”고 강조했다.

둘째, 미래를 위한 준비다. 김 회장은 “사업을 시작할 때 ‘창의성 개발, 진취적 사고, 결실있는 행동’을 사훈으로 내걸었는데 이 중 창의성은 미래를 내다보는 제품을 개발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10년 뒤 소비자들이 무엇을 찾을까 고민하고 제품을 개발한다는 것이다. 발명특허가 17건에 이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는 특수기능성 제품에 도전하고 있다. 여기엔 △실리카를 기본으로 한 유·무기 합성 하이브리드 제품 △내열성 도료 접착제, 전자 섬유 전자파차단제 등 무기코팅제 개발이 포함된다.

김 회장은 “그동안 사회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며 “이를 갚으려고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좋아하는 기업인으로 일본의 마쓰시타 고노스케를 꼽았다. 김 회장의 책 《창업에서 장수기업으로》의 총론에 그의 어록을 인용하기도 했다. ‘내가 성공한 것은 집이 가난해 어릴 적부터 구두닦이를 하면서 세상 사는 경험을 했고, 몸이 약해 운동에 힘써 건강을 유지했고, 초등학교도 못 다녀 모든 사람을 스승 삼아 배우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 회장 역시 평생을 이런 자세로 살아온 듯하다.

김낙훈 한경글로벌강소기업연구원장 n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