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한 손택수 시인
70편 시들을 챕터로 나누지 않고
곤충의 몸처럼 유기적으로 배치
'소리' 풀어낸 작품 많은 게 특징
등단 20여 년간 탄탄한 시 세계를 펼쳐온 중견 시인 손택수(50)가 최근 다섯 번째 시집 《붉은빛이 여전합니까》(창비)를 내놨다. 지난 25일 서울 청파로 한국경제신문사를 찾은 손 시인은 새 시집에 대해 “언어가 삶이 되지 못하고 있는 우리 시대에 과연 문학과 시가 있는지 질문해보고 싶었다”며 “일상에서 벗어났다가 다시 돌아왔을 때 드러나는 여백의 순간적 기록들”이라고 설명했다.
시집 제목 ‘붉은빛이 여전합니까’가 나오는 ‘붉은빛’은 “일상 속에 머무는 비(非)일상에 대해 쓴 시”라고 했다. “시에 나오는 ‘붉은빛’은 뜨거운 한낮에 눈을 멀게 하는 빛이 아니라 서서히 지면서도 나를 끌어안는 저녁노을의 빛이자 단풍잎처럼 소멸을 아는 빛이죠. 사랑의 언어인 ‘붉은빛’을 통해 일상에서 멀어진 제 마음을 다시 돌이켜보고, 그 마음이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로 연결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았습니다.”
새 시집엔 모두 70편의 시가 실려 있다. 손 시인은 이번 시집에 처음으로 1부, 2부 식으로 수록 시들을 구분하지 않았다. “시집 전체가 한 편의 시로 읽힐 수 있겠더라고요. 모자이크처럼 저마다 다른 70편이 마치 마디가 있는 곤충처럼 하나의 몸으로 유기적으로 읽혔으면 하는 기대가 생겼습니다.”
이번 시집의 특징 중 하나는 ‘소리’가 나오는 시가 많다는 점이다. “종소리는 내겐 시장기 같은 것”(‘저녁의 소리’ 중)이나 “좋은 소리는 사라지는 것이다”(‘파이프 오르간’ 중), “알함브라, 물소리가 검은 손톱 사이에서 뿜어져 나오고”(‘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중) 등이다. “‘점자별1’이란 시에 ‘호머는 맹인이었다//백문이불여일견이란 말/함부로 쓰지 말자/눈을 잃고도 그는 노래를 알았으니까’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시는 관습적으로 언어를 성찰하고 반성하는 것인데 그동안 이미지가 넘치는 시각 위주의 시가 많았죠. 한 번쯤 다른 감각으로 성찰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는 요즘 시단 내 많지 않은 서정 시인이다. 여백의 아름다움과 풍성한 시적 리듬을 담아 그늘진 곳에서 잊혀지는 약자들의 삶을 풍경처럼 담금질해 왔다. 새 시집을 본 동료 시인과 독자들은 이전 시집에 묻어났던 시선이 더 성찰적이고 고요해지고, 특유의 서정적 미학이 한층 세련돼졌다고 평가했다. 박성우 시인은 “깊고 고요해져 어떤 숲속 샘물을 보는 것 같다”고 했다. “결이 바뀐 것 같다는 얘기를 많이 들어요. 내면화된 얘기가 많아졌다고도 합니다. 시를 종이에 쓴다기보다 바위와 나무에 새긴다는 느낌으로 집중하다 보니 시간도 오래 걸렸죠. 예전엔 바깥 풍경 세계 이야기가 중심이었다면 이번엔 내 마음의 풍경이 바깥에 투사되는 느낌으로 썼어요.”
손 시인이 추구해 온 서정 미학은 2000년대 한국 시의 미학적 모험을 주도한 ‘미래파’에 밀려 시단에서 소외돼 왔다. “서정시는 수천·수만 년 동안 인간의 정서를 적셔온 어머니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못난 어머니 취급을 받아요. 20여 년간 서정시를 쓰면서 외로웠어요. 문학이란 소수 집단 안에서 또 소수자일 수밖에 없구나란 생각 때문이었죠. 그런 결핍과 외로움의 시간이 외려 서정의 밀도를 되찾아주는 귀한 시간이 됐습니다.”
22년차 시인이 생각하는 시는 어떤 모습일까. “6년 만에 시집을 내면서 시인은 역시 시를 써야 하는구나 생각했죠. 잊혀진 사물, 폐허가 된 지축처럼 돼버린 사람들을 들여다보는 역할이죠. 전남 담양에서 태어나 봤던 대나무처럼 젊은 시절 시들이 저를 지탱하는 아래 마디였다면 이번 시집은 새 가지를 쭉쭉 뻗어가는 위 마디로서 역할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은정진 기자 silv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