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버린 아버지 원망…5·18묘역 관리하며 응어리 풀어
"5·18 진상규명으로 아이들이 따뜻한 세상 살았으면…"
하얀 상복을 입고 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들고 있던 만 5살 꼬마.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눈망울과 무덤덤해 보이는 표정은 역설적으로 5·18의 비극을 뚜렷하게 드러냈다.

'죽음'이라는 단어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던 이 꼬마는 그렇게 무덤덤하게 아버지를 보냈다.

아이가 커가는 동안에도 어머니나 주변 사람들은 '그 일'에 대한 얘기를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것이 5·18민주화운동을 폭동이라고 낙인찍고 서슬 퍼런 감시를 이어가던 군사 정권 아래에서 살아남는 방법이었다.

이런 침묵 속의 고요를 깨뜨린 건 7년이 지난 1987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영정사진을 들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외신에 보도되면서 꼬마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5·18민주화운동에 동참했다가 계엄군의 집단 발포로 숨진 조사천(당시 36세)씨의 아들 조천호(45)씨 이야기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이유를 제대로 알지 못했던 조씨는 아버지를 원망하고 있었다.

지독한 가난이 찾아왔고 생계를 위해 몸부림치는 어머니의 모습과 돌봐줄 사람 없이 홀로 남겨진 3남매의 외로움까지 모두 곁에 없는 아버지의 탓으로 돌렸다.

이런 조씨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세상은 사춘기에 접어든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인터뷰 요청과 카메라 플래시 세례가 쏟아졌고, 심지어 학교 수업을 받는 도중에 누군가에게 불려 나가 함께 묘역을 둘러보는 일도 다반사였다.

그런 사이 평범하지만 쾌활했던 조씨는 내성적인 성격으로 바뀌었고, 한때 대인기피증까지 생길 정도로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한없이 비뚤어지고 싶다는 마음도 생겼지만 고생하는 어머니와 가족들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없었다.

조씨는 군대에 가서야 마음속에 남아있던 아버지에 대한 응어리가 조금씩 풀어졌다고 했다.

"아버지가 무책임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군대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하다 보니 아버지 입장도 생각해보게 되더라고요.

여전히 용서는 안 됐지만, 어느 정도는 이해하게 됐죠."
군대를 전역한 조씨는 1998년 젊은 일손이 필요하다는 5·18유족회의 부탁으로 광주 북구 망월동에 처음 마련된 5·18 희생자 공동묘지(망월동묘역)에 일용직으로 들어갔다.

다니던 대학은 야간으로 바꿔 학업과 병행하면서 묘역 관리인으로 청소 등 잡일을 도맡았다.

상처가 아물지 않은 상태에서 아버지의 묘소를 매일 봐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것보다 더 곤욕스러웠던 건 참배객에게 사진 전시실을 안내하는 일이었다.

당시 전시실엔 1980년 5월 16일부터 27일까지 5·18 전후의 상황이 사진과 함께 시간순으로 전시돼 있었고, 가장 마지막엔 조씨의 외신 사진이 걸려있었다.

조씨는 "참배객들이 오면 일자별로 설명을 해드리는 일을 했다"며 "특히 사진과 함께 영상을 틀어놨는데, 총성이 울릴 때마다 심장이 멎는 듯 했다.

너무 힘들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부정적인 면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참배객 안내를 위해 5·18을 공부하면서 조씨는 처음으로 5·18 진실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던 아버지가 가족의 곁을 지킬 수 없었던 이유를 이해하기 시작한 조씨는 마음 한편에 남아있던 상처도, 아버지를 원망하던 마음도 조금씩 조금씩 아물기 시작했다.

일부 참배객들이 영정을 든 꼬마가 조씨라는 것을 알아보고 따뜻한 위로를 건넨 것도 조씨에겐 위안이 됐다.

2001년 기능직 공무원으로 신분이 전환된 조씨는 5·18묘지가 현재의 국립5·18민주묘지로 새로 조성되면서 광주시청 공무원으로 자리를 잡았다.

처음 해보는 행정 업무가 미숙했지만, 그가 '5월의 꼬마'라는 사실을 안 동료들은 업무에 적응하고 정착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줬다.

반면 업무성과를 내거나 승진을 할 때 누군가는 "5·18 후광이라는 덕을 본 것"이라고 깎아내리는 사람도 있었다.

사진 한장이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조씨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던 셈이다.

5·18 업무와 관련 없는 부서에서 일해 온 조씨지만 마음 한편에는 여전히 '진상 규명'이 숙제로 남아있다.

자신의 자녀들에게만큼은 5·18이 상처로 남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그는 "진실이 명확해지고 시선이 따뜻해지면 우리 아이들이 할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이야기 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한다"며 "저는 그렇게 크지 못했지만, 아이들은 꼭 그런 세상에서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