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란처럼 오래 산다면 춤을 추고 싶어요" "사실 특별하지 않고 뻔한 이야기이지만 아주 위트 있게 꾸린 점이 마음에 들었어요.
책을 재미있게 읽어주면 아이가 집중해 듣듯이 삶에는 위트가 있어야 하죠. 이 작품은 알란 칼손이 들려주는 그림 동화책 같은 느낌이에요.
"
배우 배해선(46)이 연극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에서 베테랑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며 웃음과 감동을 전하고 있다.
지난 17일 대학로 한 카페에서 가진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그는 '위트'가 작품을 선택한 이유라고 밝혔다.
그는 "깔깔대다가 마지막 어느 한순간 뭉클함이 있어요.
마냥 대놓고 웃기거나 울리지 않고 관객에게 담백하고 진솔하게 다가가 좋다"고 덧붙였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은 2009년 출간 이후 전 세계에서 1천만 부 이상 팔린 스웨덴 작가 요나스 요나손 동명소설을 바탕으로 지이선 작가와 김태형 연출이 재탄생시킨 작품이다.
극은 100번째 생일파티를 앞두고 양로원을 탈출한 알란 칼손의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며 이야기를 전개한다.
돈 가방 때문에 갱단에게 쫓기는 2005년의 알란, 그의 과거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흥미로운 에피소드로 점철돼 있다.
가장 큰 특징은 배우 5명이 배역 성별과 관계없이 60여 개 캐릭터를 소화하는 '캐릭터 저글링'이다.
배해선도 100세 알란 이외에 프랑코, 스탈린, 쑹메이린(장제스 대만 초대 총통 부인), 에클룬드 박사(스웨덴 핵물리연구소), 김정일 등 다양한 인물로 등장한다.
그는 작품이 흥미로웠지만 100세 노인을 연기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앞섰다고 했다.
"인생을 더 사신 분이 들려주면 이야기에 힘이 더 실릴 것 같았죠." 결국 평소 잘 할 수 있는 것보다는 재미있어하는 작품을 선택했듯 도전에 나섰다.
공연 초반에는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기분이었다고 한다.
"너무 힘들어서 '이 공연은 하면 안 되는 거였어'라고 자주 생각했죠. 하지만 관객이 호응하고 배우들 간에 호흡이 잘 맞는 날은 너무 신이 나서 공연을 세 번도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지금은 많이 편해졌지만, 그래도 매번 쉽지 않네요.
" 배해선은 100세 알란 이외 배역도 허투루 하지 않는다.
캐릭터에 포인트를 주기 위해 역사 속 인물들을 조사하고 공부하고 연구했다.
이렇게 만화 캐릭터 딱따구리처럼 웃는 프랑코 장군, 콧수염을 기른 스탈린, 안경을 쓰고 킥보드를 타는 에클룬드 박사가 탄생했다.
그는 알란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너무 충고처럼 들리지 않기를 바랐다며 "알란은 '불행이 언젠가 행운으로 바뀌기도 하지'라고 말해요.
'행운으로 바뀌어'가 아니죠. 행운이 오면 감사하고 불행이 행운으로 안 바뀌면 희망을 꿈꾸면서 살아가요.
그냥 그렇게 사는 거죠. 이 지점을 너무 힘줘서 얘기하지 않고 잘 살려보려고 했어요.
"
그가 꼽은 알란의 매력은 '평범함'. 알란은 너무 평범하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알란이 의도하지 않은 상황에 계속 휘말리는 것도 평범함 때문이라는 것이다.
배해선은 "일단 가자!"란 대사가 가장 인상적이라고 했다.
"어느 날 연습하는데 그 말이 쑥 들어오는 거예요.
알란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지만 일단 가 보죠. 여기에서 더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면 다음 단계로 가는 거예요.
저에게는 그게 '두 발이 있고 숨이 붙어 있고 가능성이 있을 때 해보자'는 이야기로 다가왔어요.
" 작품에서 100세 알란은 푸짐한 음식과 술, 대화할 친구만 있으면 흡족해한다.
자신을 만족하게 하는 것이 있는지 묻자 그는 요즘 프로야구와 걷기에 집중한다고 했다.
"그동안은 연기가 항상 우선이었어요.
다른 건 뒷전이어서 사람을 잘 기억하지 못하고 남의 인생사나 연애사 같은 것에도 관심 없었죠. 인간적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어요.
5년 전부터 내가 좋아하고 원하는 것에 집중해 보자고 했죠."
프로야구 두산 베어스 팬이라고 밝힌 그는 야구가 자신을 신명 나게 하고, 가슴을 뛰게 한다고 했다.
시즌 중에는 야구를 보면서 휴식하고, 공연이 있을 때도 중계방송을 틀어놓고, 밤새 하이라이트를 본단다.
그는 알란처럼 오래 산다면 춤을 추고 싶다고 했다.
살아있다는 것을 극단적으로 느낄 수 있어서란다.
"사람들이 술 마시기 위해 운동한다고 하듯 춤을 추려면 자기 관리를 해야 해요.
오랫동안 행복하게 즐기기 위해 뭔가를 하는 것은 완전 '강추'에요.
이런 목표를 가지면 100세까지 즐겁게 살 수 있지 않을까요?" 배해선은 1995년 연극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데뷔해 뮤지컬 '맘마미아', '브로드웨이 42번가' 등에 출연한 베테랑 무대 배우다.
최근에는 영화 '암수살인'·'엑시트', 드라마 '호텔 델루나'·'VIP'에 출연하는 등 다양한 영역에서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는 "역시 무대가 제일 편하고 안정감이 있어요.
영화나 드라마는 초보라서 그런지 카메라 앞에서 항상 긴장되고 쉽지 않죠. 무대는 똑같은 공연이 단 한 번도 없어요.
우리를 항상 새로운 세계로 데려가는 게 매력입니다.
"
그의 도전은 계속될 것 같다.
올해 상반기에만 드라마 4편에 출연할 예정이다.
재미있는 것은 지난해 '호텔 델루나'에 이어 다음 달 tvN에서 방송하는 '하이바이, 마마!'에서도 귀신으로 나온다.
배해선은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그동안 못해 본 역할을 해서 너무 좋다고 했다.
"배우의 길은 결승점이 없는 마라톤 같아요.
평생 어딘가로 가는 거죠. 그래서 '일단 가자!'는 알란의 이야기가 더 와닿았는지 모르겠어요.
"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