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입양한인 "유일한 소원은 엄마를 만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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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11월 22일생 안나 김 레일리 씨, 아동권리보장원에 친부모 찾기 신청
"엄마, 제 말 들려요.
달을 쳐다보며 얘기하고 있어요.
오늘은 내 생일이에요.
내가 원하는 단 한 가지 소원은 엄마를 만나는 일입니다"
미국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의 미국인 가정에 입양된 안나 김 레일리(한국명 장원숙·36) 씨는 여섯 살 때부터 지금까지 생일이 되면 이렇게 기도했다.
12일 그가 친부모를 찾고 싶다며 아동권리보장원에 보낸 사연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자기 생일날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는 미신이 있는데, 레일리 씨도 매년 자신의 생일에 집 앞 계단에 앉아 달을 보면서 "빨리 만나게 해달라"고 갈구했다.
작년 한국을 떠나온 지 35년 되는 11월 22일 밤에도 그는 "그동안 과거를 그리워하지 않는 날이 단 하루도 없었어요.
꼭 만나고 싶다"고 간절한 마음을 달에 기원했다.
그는 "생일이 다가오면 가슴이 텅 빈 느낌을 받았고, 친어머니를 생각하게 됐다"며 "어머니도 나를 생각하고 있을까 반문하곤 했다"고 털어놓았다.
부족함 없이 자라 보스턴에서 대학과 대학원까지 마친 그는 친부모 생각을 떨칠 수 없어 2012년 여름 가족을 찾아 나섰다.
자신을 미국에 보낸 홀트아동복지회에서 기록을 확인했고, 퍼즐을 맞추듯이 뿌리를 찾았지만, 아직 찾지를 못했다.
그는 1984년 11월 22일 밤 대전에 있는 산부인과에서 태어났다.
그의 기록 중 이 사실만 정확하다.
나머지 '장원숙'이라는 이름을 누가 지었는지 모른다.
당시 친모는 대학생이었고, 혼자 돌볼 수 없는 처지여서 입양기관에 자신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는 사연을 입양기관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정황상 이 내용은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고 그는 생각한다.
생후 6개월 때 미국에 건너간 그는 친부도 같은 대학에 재학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레일리 씨는 양부모 슬하에서 행복하게 성장했지만 어렸을 때부터 친엄마를 그리워했다.
양부모가 결코 친엄마를 대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마음속에 간직한 친엄마를 존경했고, 사랑의 방식 또한 양어머니와 다를 것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래서 엄마가 자신을 낳고, 입양기관에 맡기는 모든 상황을 이해하게 됐고, 엄마를 책망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레일리 씨는 "내가 엄마를 이해하고 있다는 것과 있는 그대로 엄마의 모습을 기대하는 것 외에 어떠한 것도 바라지 않는다"며 "엄마에게서 태어난 그 인연은 그대로 지속된다"고 말했다.
엄마를 생각하는 마음도 사연에 담았다.
그는 "내가 떠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엄마의 가슴도 비어있을 것으로 생각한다"며 "그래서 내가 엄마를 다시 만나야만 한다"고 호소했다.
/연합뉴스
달을 쳐다보며 얘기하고 있어요.
오늘은 내 생일이에요.
내가 원하는 단 한 가지 소원은 엄마를 만나는 일입니다"
미국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의 미국인 가정에 입양된 안나 김 레일리(한국명 장원숙·36) 씨는 여섯 살 때부터 지금까지 생일이 되면 이렇게 기도했다.
12일 그가 친부모를 찾고 싶다며 아동권리보장원에 보낸 사연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자기 생일날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는 미신이 있는데, 레일리 씨도 매년 자신의 생일에 집 앞 계단에 앉아 달을 보면서 "빨리 만나게 해달라"고 갈구했다.
작년 한국을 떠나온 지 35년 되는 11월 22일 밤에도 그는 "그동안 과거를 그리워하지 않는 날이 단 하루도 없었어요.
꼭 만나고 싶다"고 간절한 마음을 달에 기원했다.
그는 "생일이 다가오면 가슴이 텅 빈 느낌을 받았고, 친어머니를 생각하게 됐다"며 "어머니도 나를 생각하고 있을까 반문하곤 했다"고 털어놓았다.
부족함 없이 자라 보스턴에서 대학과 대학원까지 마친 그는 친부모 생각을 떨칠 수 없어 2012년 여름 가족을 찾아 나섰다.
자신을 미국에 보낸 홀트아동복지회에서 기록을 확인했고, 퍼즐을 맞추듯이 뿌리를 찾았지만, 아직 찾지를 못했다.
그는 1984년 11월 22일 밤 대전에 있는 산부인과에서 태어났다.
그의 기록 중 이 사실만 정확하다.
나머지 '장원숙'이라는 이름을 누가 지었는지 모른다.
당시 친모는 대학생이었고, 혼자 돌볼 수 없는 처지여서 입양기관에 자신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는 사연을 입양기관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정황상 이 내용은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고 그는 생각한다.
생후 6개월 때 미국에 건너간 그는 친부도 같은 대학에 재학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레일리 씨는 양부모 슬하에서 행복하게 성장했지만 어렸을 때부터 친엄마를 그리워했다.
양부모가 결코 친엄마를 대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마음속에 간직한 친엄마를 존경했고, 사랑의 방식 또한 양어머니와 다를 것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래서 엄마가 자신을 낳고, 입양기관에 맡기는 모든 상황을 이해하게 됐고, 엄마를 책망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레일리 씨는 "내가 엄마를 이해하고 있다는 것과 있는 그대로 엄마의 모습을 기대하는 것 외에 어떠한 것도 바라지 않는다"며 "엄마에게서 태어난 그 인연은 그대로 지속된다"고 말했다.
엄마를 생각하는 마음도 사연에 담았다.
그는 "내가 떠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엄마의 가슴도 비어있을 것으로 생각한다"며 "그래서 내가 엄마를 다시 만나야만 한다"고 호소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