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국민청원 거쳐 안전시설 강화·가해자 가중 처벌 규정 마련 추석 연휴가 시작되면서 모두의 마음이 고향으로 향하던 올해 9월 11일 오후 6시.
충남 아산 온양중학교 정문 앞 사거리 인근 횡단보도에서 단란한 가정을 한순간에 충격으로 몰아넣은 끔찍한 사고가 일어났다.
부모에게는 평생 잊혀지지 않을 그 날, 초등학교 2학년 김민식(9) 군은 동생(4) 손을 잡고 엄마가 일하는 치킨집을 향해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다.
절반쯤 건너던 순간 교차로를 막 지나온 코란도 차량이 민식 군 형제를 덮쳤다.
닭을 튀기며 평소와 같이 횡단보도 앞 가게에서 일하던 민식 군의 엄마(33)는 갑자기 '쿵'하는 소리에 하던 일을 멈추고 밖을 내다봤다.
큰아들과 셋째아들이 도로에 쓰러져 있었다.
당시 둘째 아들은 가게에서 엄마와 함께 있었다.
놀란 가슴을 억누를 사이도 없이 밖으로 뛰어나간 엄마는 쓰러진 아들들을 부여잡고 '살려달라'며 주위에 도움을 요청했다.
민식 군은 병원으로 옮겨지던 중 끝내 숨을 거뒀다.
동생은 온몸에 찰과상을 입었지만, 다행히 생명에 지장은 없었다.
이 장면은 고스란히 인근 차량의 블랙박스 영상에 담겼다.
이곳 교차로에는 신호등이나 과속 단속 카메라가 없었다.
어린이보호구역(스쿨존)인데도 어린이 교통안전을 위한 최소한의 시설조차 설치되지 않았던 것이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만들어진 과속방지턱이 전부였다.
사고 뒤 며칠이 지나 스쿨존 교통안전을 강화해 달라는 요청이 청와대 국민청원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민식이 어머니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그는 "용돈이 생기면 붕어빵을 사서 식을까 봐 가슴에 꼭 끌어안고 달려와 먹어보라고 내밀던 착한 아이였는데, 하늘의 별이 됐어요.
엄마가 피곤할까봐 두 동생을 알뜰히 챙기던 민식이가 저에게 끝없는 사랑만 주고 떠났습니다"라며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사고 한 달쯤 뒤인 10월 13일과 15일 아산을 지역구로 둔 더불어민주당 강훈식 의원과 자유한국당 이명수 의원이 낸 특정범죄가중처벌법(특가법) 등의 개정안을 묶은 이른바 '민식이 법'이 발의됐다.
이 법안은 소관 상임위인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법안심사소위에 넘겨졌으나, 선거법과 검찰개혁법 등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법안을 둘러싼 여야대립 속에 차일피일 미뤄지며 심의조차 되지 못한 채 시간을 흘려보냈다.
급기야는 대통령까지 나섰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달 19일 열린 '국민이 묻는다, 2019 국민과의 대화'에서 "스쿨존에서 모든 아이가 안전하게 보호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날 '국민과의 대화' 첫 질문자로 지목된 민식 군 부모는 "아이들 이름으로 법안을 만들었지만, 단 하나의 법도 (국회에서) 통과되지 못했다"고 울먹였다.
이에 문 대통령은 "국회에 계류 중인 법안이 통과되지 못하고 있어 많이 안타까워하실 것 같다.
국회와 협력해 빠르게 법안이 통과되도록 노력해나가겠다"고 답했다.
여야도 '민식이법'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견이 없는 만큼 최대한 이른 시일 내에 법을 통과시키기로 했다.
법안은 발의된 지 30여일, 대통령 답변이 있은 지 이틀 후인 지난달 21일 마침내 국회 첫 문턱을 넘었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법안심사소위는 이날 어린이 보호구역에 과속단속 카메라 설치 등을 의무화하는 내용의 도로교통법 개정안 등을 의결했다.
이어 국회 행정안전위원회도 문 대통령의 '국민과의 대화' 8일 만인 지난달 27일 전체회의를 열고 '민식이법'을 의결했다.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다.
이 법안은 본회의에서 또 한차례 진통을 겪었다.
정기국회를 11일 남겨놓은 지난달 29일 자유한국당이 민식이법을 포함한 200개 안팎 안건 전체에 대해 무제한 토론, 즉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를 신청하면서 사실상 정기국회가 중단됐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 등이 회의에 불참하면서 의결정족수 미달로 국회 문조차 열지 못한 것이다.
민식이법 처리가 국회에서 지연되는 와중에도 검찰과 경찰, 서울시, 전국 지방자치단체 등은 스쿨존 안전대책 강화를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다.
대검찰청은 스쿨존 안 사망이나 중상해 사고에 대해 원칙적으로 구속 수사 하도록 일선 검찰청에 지시했다.
법 개정 전이라도 엄정하게 대응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경찰청도 '제2 민식이'를 막기 위해 스쿨존 안전대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등하교 시간 통학로에 경찰관을 추가로 배치하고, 단속 장비도 확대 설치하는 내용 등이 담겼다.
민식이가 살던 충남 아산시를 비롯해 서울시 등 전국 지방자치단체도 어린이보호구역 사고 줄이기 대책을 쏟아냈다.
민식이법은 우여곡절 끝에 발의 두 달만인 지난 10일에야 가까스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 법(도로교통법,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 법률안)에는 스쿨존에 과속 단속 카메라와 신호등 설치를 의무화하는 내용이 담겼다.
속도제한(30km)과 횡단보도에 관한 안전표지, 과속방지시설, 미끄럼방지시설도 함께 설치하도록 명시돼 있다.
제한 속도를 지키지 않거나 보호 의무를 위반해 어린이를 사망케 하거나 다치게 하면 가중 처벌된다.
속도를 지키지 않거나 전방 주시 태만 등으로 어린이가 사망하면 무기 또는 3년 이상 징역, 상해를 입히면 1년 이상 1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3천만원의 벌금형에 처하게 돼 있다.
이 때문에 처벌조항이 다른 법률에 비해 과도하다는 논란도 일고 있다.
한 교통사고 전문변호사는 "교통사고로 사망을 일으킨 과실이 사실상 살인행위와 비슷한 음주운전 사망사고, 강도 등 중범죄의 형량과 비슷하거나 더 높아서는 안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 국회의원도 "스쿨존에서 주의 의무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고의와 과실범을 구분하는 것은 근대 형법의 원칙"이라고 밝혔다.
민식 군 아버지는 법안이 처리된 후 국회에서 "법안을 발의하고 통과시키려고 했던 이유는 아이들이 조금이나마 안전해졌으면, 다치거나 죽는 아이들이 더는 없기를 바랐기 때문"이라고 감회를 전했다.
당시 민식이법을 촉발한 운전자는 구속됐다.
법원은 사안이 중하고 스쿨존 횡단보도에서 사고를 낸 점을 고려해 지난달 1일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