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소리·지현준 주연 연극 '사랑의 끝' 리뷰
프랑스식 사랑과 헤어짐이 한국형 이별이 되기까지
해외 연극을 국내로 들여왔을 때 원작의 감동을 재현하기란 쉽지 않다.

갈등이 존재하는 사회적 맥락과 토씨 하나로 뉘앙스가 달라지는 언어의 세밀함을 담아낼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 연극이기 때문이다.

지난 7일 성동구 우란2경에서 개막한 연극 '사랑의 끝'이 그랬다.

프랑스 작가 파스칼 랑베르 2011년 현지에서 첫선을 보였고 국내 초연이다.

프랑스 연출가 아르튀르 노지시엘이 연출을 맡았다.

사랑이 끝난 순간, 서로에게 이별을 이야기하는 남녀의 순간을 담은 2인극은 다소 생경한 언어 탓에 관객에게 선뜻 다가오지 못했다.

주인공인 연출가와 여배우는 한때 사랑을 했다.

공항으로 가던 길, 남자가 길에서 주운 의자를 비행기 수화물로 부치지 않고 미련하게 꼭 끌어안고 와도 여자는 "이 새끼 너무 사랑스럽네"라고 생각했다.

남자는 여자의 빛나는 재능을 숭배했고, 자신의 작업물이 세간의 비웃음을 살 때면 여자에게 구원을 얻었다.

아이 셋을 낳고 살 비비며 살았으며, 100살까지 함께 늙어가는 꿈도 꿨더랬다.

이 과정은 남녀 각각 약 50페이지에 달하는 엄청난 양의 독백으로 전달된다.

전반 60분간, 남자 역을 맡은 배우 지현준은 두 사람의 사랑을 모욕하고 무자비하게 공격한다.

여자 역의 배우 문소리는 꼿꼿이 서서 폭언을 견디다가 후반 60분, "끝났니?"라는 말과 함께 처절한 반격을 시작한다.

프랑스식 사랑과 헤어짐이 한국형 이별이 되기까지
보통의 관객이 기대하는 서사를 발견하긴 어렵다.

연극에는 두 인물이 갈라서게 된 이유는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다.

이에 대해 노지시엘 연출은 "이들이 왜 헤어졌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관객은 마치 눈앞에서 사고를 목격하는 것처럼 헤어지는 '순간'을 목격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휑한 공연장은 관객이 목격자가 되길 바라는 연출가 의도에 부합한다.

조명은 무대를 밝히고 객석을 어둡게 하는 일반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때때로 무대와 객석의 조도를 동일하게 만든다.

이때 관객은 파국으로 치달은 연인을 코앞에서 지켜보는 관계자가 된다.

배우들이 극 중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은 게 아니라 '문소리', '지현준'이라는 실명으로 연기한다는 점도 연극과 현실의 구분을 흐린다.

배우들의 호연은 "헤어질 때는 진짜 저렇게 싸우지"라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게 하지만, 번역체 대사는 종종 현실감을 반감시킨다.

임금이나 왕후의 무덤을 뜻하는 '능(陵)', 계약 당사자 양쪽이 서로 의무를 진다는 뜻의 '쌍무적(雙務的)' 등 실생활에서 잘 쓰이지 않는 단어가 반복될 때 몰입감이 떨어진다.

이탈리아 화가 마사초(1401∼1428)의 그림 '낙원에서의 추방'이나 여러 성경적 가치들과 같은, 서양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알 법한 메타포가 한국 관객에게 이질감 없이 전달됐을지는 의문이다.

프랑스식 사랑과 헤어짐이 한국형 이별이 되기까지
노지시엘 연출은 "파스칼 랑베르의 독창적이고 아름다운 단어들을 통해 배우들 자신에게, 그리고 관객들에게 세심하게 말을 거는 무대를 만들어낼 것"이라고 기대했다.

국내에서 보기 드문 실험적 연극인 건 분명하지만, 연출가 자기만족에 그치지 않고 관객과 제대로 소통이 이뤄졌는지는 물음표가 남는다.

공연은 오는 27일까지 우란2경. 전석 3만원.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