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자락인 전북 남원으로 귀농·귀촌한 사람들이 만든 단체 '사회연대쉼터'는 세상일에 지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달 동안 무료로 살 수 있는 무료 쉼터를 운영 중이다.

이웃 사찰인 귀정사로 템플스테이를 하는 사람들도 밤에는 쉼터 사람들과 현실적인 귀농·귀촌에 대한 얘기를 나눌 수 있다.

[도시탈출] 귀촌자들과 함께하는 '지리산 한 달 살기'
◇ 먹을 것과 잘 곳을 내준 법정 스님
류시화 시인이 기록한 법정 스님의 일화를 소개한다.

아들을 잃어버린 한 중년 여인이 절간에서 법정 스님과 식사를 하게 됐다.

스님 앞에서 오열하던 여인을 보고 법정 스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반찬을 내밀고 어서 먹기를 권했다.

스님은 다른 반찬도 끌어다 앞에 내놓으며 아들에 대한 여인의 이야기에 정성스레 귀를 기울였다.

중년 여인은 가까스로 평정심을 되찾고 산문을 나섰다 한다.

비슷한 이야기는 또 있다.

전남 순천 송광사 암자인 불일암에서 지내던 법정 스님을 한 여인이 찾아왔다.

스님은 남편이 빚보증을 잘 못 해서 전 재산을 날렸다는 이야기를 아무 말 없이 들어줬다.

흐느끼는 여인에게 스님은 "산에 올라왔으니 하룻밤 자고 내려가라"는 말 한마디를 건넸다.

여인은 법정 스님이 내준 방의 군불을 지피고 스님과 앉아 묵묵히 차를 마신 뒤 1박을 하고 다음 날 일어나 기운을 차리고 나갔다.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 먹을 것과 잘 곳을 내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힐링이었다.

◇ 귀농·귀촌자들이 운영하는 쉼터
전북 남원시 산동면에 자리 잡은 사회연대쉼터는 어쩌면 법정 스님의 거둠의 정신을 가장 잘 실현해 온 곳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싶다.

사람은 누구나 다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존재다.

얼핏 보기에는 그럴듯한 지위와 경제력을 가진 사회 지도층이나 유명인들도 결코 상처에서 자유롭지 않다.

상처 입은 사람들에겐 안식처가 필요하다.

그 안식처가 되겠다고 나선 곳이 바로 사회연대쉼터다.

쉼터는 세상일에 지친 사람들이 한 달 동안 무료로 살면서 자신을 치유할 수 있는 무료 숙소를 운영하고 있다.

누구나 갈 수 있는 곳이지만, 어떤 사람을 받을지는 운영자들이 결정한다.

무료 숙소는 대한불교조계종 산하 귀정사 소유의 부지에 있다.

귀정사는 515년 백제 무령왕 때 지어졌는데, 창건 당시 이름은 '만행사'였다.

한국전쟁 때 불에 탄 뒤 전후에 재건됐으며, 현재는 주지가 거주하지 않는 사찰로 운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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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연대쉼터는 귀정사 측과 함께 사찰 부지에 틈틈이 집을 지었다.

2013년 모두 3채의 집을 짓고 쉼터 개소식을 연 것이 시작이었다.

지금은 모두 7채로 늘어났고 5채에 사람들이 머무르고 있다.

쉼터의 공동대표는 귀정사 주지인 중묵처사이며, 실질적으로 쉼터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2007년 귀농한 장병관 집행위원장 등 모두 5명의 귀농·귀촌자다.

이들은 전북 남원을 중심으로 함께 농사를 지으며 때때로 황토방이라고 불리는 일종의 흙집을 짓는 프로젝트도 진행한다.

나무 골조로 집을 짓고 진흙을 두껍게 발라 단열도 잘된다.

초기에 쉼터를 주로 사용하던 사람들은 노동운동을 하던 사람들이었다.

최근에는 사회에서 상처 입은 사람들을 받는 데 더 집중한다.

경쟁이 치열한 도시에서 밀려난 이들을 위한 안식처인 셈이다.

그들이 힘을 차려 지역에 발붙여 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는 것이 목표다.

지금까지 이곳을 거쳐 간 수많은 사람 가운데 남원과 인근 농촌 지역에 귀촌·귀농한 사람은 20여명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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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쉼터 생활
쉼터에 머무는 사람들의 경비는 100여명의 쉼터 회원들이 낸다.

지금 쉼터에 묵고 있는 사람 가운데는 중국에서 한의학을 공부한 김모 씨도 있다.

그는 중국에서 한의학을 공부하고 의사 면허증까지 땄지만, 중의사 자격증으로는 한국에서 개업할 수 없어 국내에서 생업을 가지지 못한 채 3개월째 거주하고 있다.

그는 조만간 남원에 정착할 계획을 세우고 거주할 곳을 물색하고 있다고 한다.

그를 만난 것은 계곡 물가에서였다.

귀정사 아래 대숲으로 난 길을 걸어 내려가니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 있다.

김씨는 계곡 한쪽에 앉아 돌로 둑을 쌓는 놀이를 하고 있었다.

답답한 마음을 달랠 좋은 방법 같았다.

별말 없이 돌 쌓기에 열중하는 그의 모습을 보니 치유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달그락, 돌 쌓이는 소리와 계곡물 흐르는 소리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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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둑어둑해지니 사람들이 한두 명씩 쉼터로 돌아가 아궁이에 불을 땐다.

무척 더운 날씨였지만, 쉼터가 있는 귀정사 터는 저녁이면 서늘한 기운이 감싼다.

또, 불을 때 줘야 눅눅한 습기가 달아난다고 한다.

쉼터는 독채로, 1인 1실 원칙을 고수한다.

화장실과 세탁실 등은 따로 마련된 복합건물을 공동으로 사용한다.

쉼터 아래쪽에는 남원시에서 운영 중인 '귀촌인의 집'도 있다.

때마침 남원시청 담당자가 방문해 귀촌인의 집 보수 공사 일정 등을 쉼터 측과 논의했다.

남원시에는 이런 귀촌인의 집을 모두 13곳 운영하고 있다.

쉼터 바로 앞에 있어 쉼터 운영자들이 이곳 사람들의 정착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고 한다.

◇ 쉼터와 활동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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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스름이 깔리자 사람들이 차를 타고 어디선가 나타나 '그물코' 카페로 모여들었다.

카페의 위치가 절묘하다.

거처가 있는 곳들을 내려다보는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아름드리나무가 있고 그 아래 카페가 있다.

하나둘씩 모여든 이들은 곧 문을 열 예정인 목공모임인 가칭 '적정 생활기술' 참여자들이다.

귀농·귀촌자들과 지역의 홀로 사는 노인 등을 위한 가옥 수리에 필요한 생활기술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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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 한 명인 김달영 씨는 쉼터에서 생활했던 경험이 있다.

지난해 4개월가량 쉼터에서 지내던 그는 올해 봄 남원 시내에 방을 얻어 독립했다.

부정기적이지만 일자리도 구한 그는 이제 남원으로 귀촌한 사람이 됐다.

목공모임에 참여 중인 그는 자신이 받았던 도움을 이제 지역 사회에 되돌려줄 생각이다.

다음 날 아침에도 쉼터를 찾은 그는 카페 앞 텃밭에서 쉼터 집행위원들과 함께 싱싱하게 익은 고추를 땄다.

그는 "지난해 몸과 마음이 피폐해졌을 때 이곳에서 큰 도움을 받았다"고 고마움을 표했다.

그는 자신이 받은 도움을 되돌려주기 위해 목공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 귀촌자들과 섞이는 독특한 템플스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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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먹고 자는 사람들은 모두 귀정사 사찰 식당인 '공양깐'에서 식사를 해결한다.

공양깐에서는 점심과 저녁을 내준다.

소박한 밥상이지만, 주로 이곳에서 직접 기른 농산물이 식탁에 오른다.

유기농 식단인 셈이다.

귀정사에서 운영하는 식당이다 보니, 식사 시간에는 자연스레 템플스테이 하는 사람들과 섞이게 된다.

템플스테이를 하는 한 중년 여성 옆으로 쉼터 거주자들이 겸상했다.

경기도 수원시에서 템플스테이를 위해 내려왔다고 한다.

이런저런 질문과 대답 속에 이 여성은 쉼터 거주자들과 자연스레 말을 섞게 됐다.

그는 다른 유명한 사찰에서 운영하는 템플스테이를 다녀봤는데 시끄럽고 고요한 느낌이 없었다며 귀정사를 찾은 이유를 설명했다.

그날 귀정사에서 템플스테이 하는 사람은 그 혼자였다.

방은 넘쳐나는데 왜 더 받지 않느냐고 쉼터 집행위원들에게 물어봤더니 복잡하면 템플스테이의 매력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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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은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조용한 절간 앞 벤치에 앉아 잠시 절간 위로 펼쳐진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진정한 평화란 이런 것이다.

여기서 1박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러나 회원도 아니었고, 무료 숙박을 할 수도 없는 일.
아쉬움을 뒤로 하고 남원 시내로 돌아와 미리 잡아놓은 게스트하우스에 묵었다.

다음에는 반드시 이곳에서 숙박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 Information

▲ 쉼터에 거주하고 싶으면 집행위원들을 만나는 인터뷰가 필수다.

그들이 수용 여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쉼터에 관심 있는 사람은 사회연대쉼터 홈페이지를 통해 물어볼 수 있다.

▲ 템플스테이는 1주일 단위로만 예약을 받는다.

하루 이틀 있다가 훌쩍 떠나는 듯한 느낌으로는 진정한 템플스테이를 할 수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9년 9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