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성 전 총리 "한일 최악 상황…멀리 보는 지혜·용기 필요"
일본의 패전일이자 한국 광복절인 지난 8월 15일 일본 정부 주최로 열린 전몰자 추도식에서 나루히토(德仁) 일왕은 '깊은 반성'을 언급했다.
그러나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와 중·참의원 의장 등 일본의 행정부와 입법부 수장들 입에선 '반성'이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같은 날 한국에선 문재인 대통령이 일본을 향해 대화와 협력의 길을 선택한다면 기꺼이 손을 잡겠다고 했는데 일본 측에선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2009~2010년 민주당 정부를 이끌며 총리를 지낸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동아시아공동체연구소 이사장은 28일 이런 일본의 상황을 2차 세계대전 이전의 '대(大)일본주의' 사고에 빠진 것이라고 진단했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이날 일본 중의원 제1 의원회관 국제회의장에서 민간남북경제교류협의회(회장 정양근)와 동아시아총합연구소(이사장 강영지<재일동포>)가 '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과 국제사회의 역할'이란 주제로 공동 개최한 '동아시아 국제심포지엄'에서 기조강연을 했다.
그는 "일본은 식산흥업, 부국강병이란 구호 아래 구미 열강에 뒤질세라 식민지 쟁탈전을 벌여 한반도 등을 식민지화한 시기가 있었다"며 "일본의 식민지화가 결과적으로 남북분단의 원인이 되어 오늘날 남북분단에는 일본의 큰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전후 일본은 두 번 다시 전쟁하지 않겠다고 해서 평화헌법을 만들었지만, 미국의 비호 아래 전혀 다른 방향으로 군사력을 키우는 새로운 대(大)일본주의를 추구하고 있다"며 이 방향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일본은 전쟁을 일으켜 아주 못된 짓을 많이 했고 나라도 굉장히 어려운 상황에 부닥쳤다"며 일본은 다시는 군사적 의미에서 전쟁해선 안 된다는 걸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일본은 이웃 나라인 한국, 중국 및 북한과도 우호 관계를 구축, 군사력을 증강해야 하는 전전(戰前)의 '대일본주의'가 아니라 '미들사이즈'의 나라로 행복을 공유할 수 있는 국가를 지향해야 한다고 했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한국을 식민지화했던 일본의 사죄 태도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전쟁으로 상처를 입힌 사람들은 그 일을 잊기 쉽지만, 상처를 입은 사람들은 평생 잊을 수가 없다"며 무한책임을 거론했다.
패전국으로 상처를 입힌 쪽인 일본은 식민지가 되어 상처를 입은 한국 사람들이 사죄할 필요가 없다고 할 때까지 계속 사죄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아베 정부가 2015년 합의를 통해 해결했다고 주장하는 위안부 문제가 계속 불거지는 것에 대해선 일본이 무한책임론을 이해하지 못해서 비롯되는 문제라며 "(일본은) 상처를 입은 분들이 '더는 사죄를 안 해도 된다.
우리도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징용 배상 문제와 관련, 일본 정부도 과거에는 개인 청구권 자체가 소멸한 것은 아니라는 입장이었다며 완전히 해결됐다고 주장만 할 것이 아니라 원점으로 돌아가 이 문제를 풀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일본 정부가 안보상의 명분을 들어 수출 규제 보복을 단행하고 한국은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로 맞서는 등 한일관계가 정치, 경제적으로 경색된 상황에 대해 "일부 정치가에게 플러스가 될 수 있겠지만 양국 국민에겐 백해무익한 일"이라고 했다.
그는 "일본은 한국을 '화이트국가'(백색국가)로 다시 넣고 한국은 일본에 대한 대응조치를 중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라며 한일 양국이 전향적으로 결론을 내길 바란다고 언급했다.
제2 기조 강연에 나선 이수성 전 총리는 "한일 양국이 1965년 국교 정상화 이후 최악의 상황을 지나고 있다"며 "보다 멀리 보는 큰 틀의 역사 인식으로 관계를 조망하는 지혜와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전 총리는 "한반도와 일본은 1천500여년 이상의 시간을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협력 속에 지냈다"며 "400여년 전의 7년간과 20세기 초 약 50년간 불행했던 역사가 있었지만, 양국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깊게 결합해 많은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지도자들이 자신 또는 자신이 속한 집단의 찰나적인 이해 때문에 선린 우호의 역사를 부정하고, 갈등과 대결의 시대로 몰아가는 것은 온당치 않다"며 국민과 국민 간의 관계를 중시하는 양국 관계가 정립돼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전 총리는 또 "한일 간의 갈등은 두 나라에 상처를 주는 데 그치지 않고 동아시아 안보질서와 세계 경제를 흔드는 악영향을 초래할 것"이라며 "양국 지도자들과 시민사회가 서로 자극하는 발언을 자제하면서 대결적 자세를 거두고, 성찰의 시간을 가질 것을 제안한다"고 말했다.
이 전 총리는 현 사태를 해결하는 데 1998년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총리가 채택했던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귀중한 초석으로 삼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일본이 과거사에 대해 반성과 사죄를 표명하고 한국은 미래지향적인 관계 발전을 확인한 이 공동선언의 정신이 계승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아베 도모코(阿部知子) 중의원 의원(입헌민주당)은 인사말을 통해 반도체 소재의 한국 수출 규제 문제 등이 일본 국회에서 제대로 논의되지 않는 등 아베 정부에서 삼권분립에 의한 통치 원칙이 무너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