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박물관에 1955년부터 쓴 일기 65권 기증…사회상도 담겨
"농사 잘하려고 일기 적어"…박물관 측 "부족한 근·현대 농촌의 생생한 자료"
64년간 농사일기 쓴 김홍섭 할아버지 "삶 다할 때까지 기록"
"제가 얼마나 살지는 모르지만, 생을 다할 때까지 일기를 쓰고 싶습니다.

그리고 울산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 사람 일생과 역사의 기록이 박물관에 오랫동안 보전돼 많은 사람이 봐주면 좋겠습니다.

"
농사를 평생 직업으로 살아온 80대 할아버지가 20대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60년 넘게 써온 농사일기를 공개했다.

울산시 울주군 두서면에 사는 김홍섭(87) 할아버지는 1995년 10월 10일부터 64년 동안 매일 작성한 농사일기를 1일 울산박물관에 기증했다.

김 할아버지가 기증한 농사일기는 대학노트로 모두 65권. 지금 쓰고 있는 66권째 일기는 다 쓴 뒤 다시 기증할 예정이다.

김 할아버지가 농사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23살 때부터다.

18살에 1950년 6·25 한국전쟁 참전 후 5년 가까운 군 복무를 마치고 고향 울산에 돌아온 직후 농사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부터 일기를 적었다.

64년간 농사일기 쓴 김홍섭 할아버지 "삶 다할 때까지 기록"
김 할아버지의 일기에는 1950년대부터 영농의 모든 기록이 담겼다.

주로 논농사와 보리, 콩, 수수, 조, 고추, 마늘, 옥수수 등 밭농사를 함께 했고, 아버지에 이어 자신과 아들까지 3대가 농사를 짓고 있다.

아들은 회사에 다니다가 정년퇴직한 뒤 아버지 농사를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그는 농부이기도 하지만, 농사일기에는 영농법뿐만 아니라 쌀과 보리, 고추, 마늘, 소와 닭, 달걀 등 각종 농축산물 가격과 시세 변동 등 당시 사회상을 파악할 수 있는 생활경제 자료가 가득 담겨 있다.

농촌 경제 중심의 삶이었던 당시의 삶을 일기를 통해 엿볼 수 있다.

농사를 지어 장날에 물물교환으로 필요한 생필품을 구매한 내용, 농사 품앗이, 길흉사에 낸 부의금 액수 변천, 장날 부모님 기일 제사 준비, 화폐 개혁에 따른 혼돈, 언양과 봉계 장날 이야기 등 한 시대의 일상과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글과 한자를 혼용한 이 일기를 김 할아버지는 생활일기라고 한다.

64년간 농사일기 쓴 김홍섭 할아버지 "삶 다할 때까지 기록"
근래에는 체육과 정치 분야를 막론하고 자신의 하루하루 생활과 느낌을 일기에 담아냈다.

올해 2월 27일 일기는 "미국 트럼프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베트남 하노이에서 대화하는 장면을 TV에서 봤다.

좋은 결과가 있어 진정한 평화가 왔으면 좋을 텐데"라고 썼다.

64년간 농사일기 쓴 김홍섭 할아버지 "삶 다할 때까지 기록"
김 할아버지가 농사일기를 쓰게 된 계기는 농사일을 잘할 줄 몰랐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농사일을 제대로 배우지 못해 농사 경험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며 "기록으로 남기면 영농하는 데 도움 될 것이라고 생각해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어 "농사일기가 농사 짓는데도 도움 되지만 인생살이를 기록하는 과정에서 자기반성도 하고 수양도 하고 인생을 연구하는 데도 해는 안 되겠다 싶어 더 열심히 기록했다"며 "그렇게 하루 이틀 쓰다 보니 1, 2년이 가고 다시 20, 30년이 지나 60년이 훌쩍 넘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힘든 농사일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 엎드려 일기를 쓰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자라온 아이들도 많은 것을 느끼고 긍정적인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한다.

김 할아버지가 요즘 쓰는 농사일기는 큰아들이 하는 농사를 기록하고, 아침에 일어나서 무엇을 하는지 자신의 평범한 하루를 남긴다.

64년간 농사일기 쓴 김홍섭 할아버지 "삶 다할 때까지 기록"
그는 앞으로 정신력이 온전할 때까지 꾸준히 일기를 쓰면서 아들 농사와 나의 하루를 기록하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김 할아버지는 "집보다 박물관에 두는 것이 영구보존할 수 있다고 생각해 나의 분신 같은 64년간 농사일기를 기증한 것"이라며 "울산에 사는 어느 농부, 노인의 일생을 기록한 이 일기가 작은 역사의 한 토막이지만 많은 사람이 봐주고 좋은 것을 많이 느꼈으면 한다"고 기대했다.

울산박물관 관계자는 "김씨 농사일기는 한 개인이 64년 동안 쓴 일기로 아주 드문 사례"라며 "울주군에서 오랫동안 농업에 종사해 온 김씨가 매일 기록해 농업 기록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울산 근현대 농촌 모습을 알 수 있는 자료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