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이규채 기억록'
자술 연보와 소송기록으로 본 항일투사 이규채
"2천만 민중의 마음을 귀순시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2천만 민중이 한 사람도 남지 않고 죽임을 당하기 전까지는 독립운동은 종식되지 않을 것이다.

"
독립운동가 이규채(1890∼1947)는 1934년 12월 8일 중국 상하이 일본총영사관 사법경찰관 후지 다다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는 그해 10월 25일 상하이에서 한약을 사러 갔다가 한약방 앞에서 경관에게 붙잡혔다.

경기도 포천 출신인 이규채는 고향에서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다 경성 창신서화연구회를 발족했다.

1924년 상하이로 망명해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이 됐고, 만주 한국독립당 총무위원장 겸 한국독립군 참모장으로 활동했다.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나온 신간 '이규채 기억록'은 잘 알려지지 않은 항일투사 이규채가 쓴 자술 연보와 각종 소송기록을 바탕으로 그의 삶과 독립운동 여정을 복원한 책이다.

독립운동사 연구자인 박경목 서대문형무소역사관 관장이 엮었고, 번역본과 영인본(복제본)·탈초한 원문을 함께 수록했다.

자술 연보는 이규채가 1890년부터 1944년까지 겪은 일을 회고록 형태로 집필한 글이다.

그는 마지막 부분에서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부인이 살아 있음에 감사하면서 "19년 동안 생이별을 한 가장으로서 다시금 집안을 온전히 꾸릴 수 있었으니, 이것은 기대 밖이었다"고 적었다.

박 관장은 "이규채 자술 연보는 독립운동가 삶의 궤적과 그 현장을 추적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와 의의가 있다"며 "연보를 통해 이규채가 확고한 민족주의자였고, 독립운동가에 대한 일제 정탐과 회유가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자술 연보와 소송기록으로 본 항일투사 이규채
책에 실린 소송기록은 상하이 일본총영사관이 1934년 11월 14일부터 12월 15일까지 이규채와 네 차례 만나 주고받은 말을 정리한 청취서와 경찰과 검찰 신문조서, 판결문, 상소권 포기 신청서로 구성된다.

이규채는 1935년 2월 26일 공판에서 "나는 총독정치의 부당한 압박에 자극받아 조선의 독립운동에 몸을 던졌고, 독립이 되지 않은 동안은 다시 조선 땅을 밟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부모와 처자를 버리고 해외로 나갔다"고 말했다.

또 재판장이 가산면장으로 활약하는 형제와 제휴할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을 하자 "내가 일본의 시정에 호의를 갖고 있다는 것과 조선의 독립을 열망하고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며 "형이 어떤 일을 하든지 나의 신념을 굽혀 그것과 동화하는 일은 전연 불가능하다"고 강조했다.

법원에서도 소신을 꺾지 않은 이규채는 결국 치안유지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고, 1940년 가석방됐다.

박 관장은 서문에서 "이규채 기록에는 인간으로서 고민, 독립운동 중 경험한 인간관계와 갈등, 고단함의 흔적 등이 나타난다"며 "이규채뿐만 아니라 이름 없이 사라진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기억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일빛. 848쪽. 4만5천원.
자술 연보와 소송기록으로 본 항일투사 이규채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