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정부가 범죄인 인도법안(중국 송환법) 처리를 무기한 연기한다고 발표했지만 완전 철회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시위는 계속되고 있다. 홍콩 중문대 등 7개 대학 학생회가 전 날 송환법 완전 철회, 체포된 시위 시민 석방 등 네 가지를 요구했지만 홍콩 정부가 수용하지 않자 학생과 시민들은 21일 경찰본부 앞 등에서 시위를 벌였다
16일 서면 사과로 시민 분노 가라앉지 않자 재차 사과 나서12일 시위 '폭동' 규정했다가 발뺌…송환법 철회·사퇴 요구 거부야당, 내각 불신임안 제출키로…온라인서는 대규모 청원 운동'범죄인 인도 법안'(송환법) 추진으로 인한 시민들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홍콩 행정 수반인 캐리 람(林鄭月娥) 행정장관이 시민들에게 직접 사과했다.캐리 람 행정장관은 18일 오후 홍콩 정부청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나는 시민들이 외치는 소리를 들었고, 일어난 일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며 "대부분의 책임은 내가 질 것이며, 홍콩 시민들에게 가장 진심 어린 사과를 한다"고 밝혔다.그는 "부모들, 젊은이들 그리고 평소 의견을 표출하지 않던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오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느끼는 것을 이해하게 됐다"며 "행정장관이 젊은이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지길 원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이번 일로 내가 더 잘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캐리 람 장관은 주최 측 추산 200만 명의 홍콩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지난 16일 저녁 서면 성명을 내고 사과의 뜻을 밝혔지만, 시기가 너무 늦은 데다 사과의 수위도 너무 낮다는 비판을 받았다.특히 지난 12일 시위를 "노골적으로 조직된 폭동의 선동"이라고 비판한 것을 철회하지 않아 야당과 시민단체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지난 12일 수만 명의 홍콩 시민이 입법회 건물 주변에서 송환법 저지 시위를 벌이자 경찰은 최루탄, 고무탄, 물대포 등을 동원해 강경 진압에 나섰다.이 과정에서 8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캐리 람 장관은 "경찰, 언론인 등 여러 사람이 다친 것에 슬픔을 느낀다"며 "시위 과정에서 다친 사람들이 조속히 회복하고, 사회의 균열이 하루빨리 치유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하지만 12일 시위를 '폭동'으로 여기느냐는 질문에는 "정부는 시위 참여자들 특히 젊은 학생들을 폭도로 부르거나 여긴 적이 없다"고 말해 자신의 발언에 대해 발뺌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캐리 람 장관은 지난 12일 밤 배포한 동영상 성명에서 "이는 노골적으로 조직된 폭동의 선동으로, 홍콩을 사랑하는 행동이 아닌 보통 사람의 안전에 심각한 위협을 가하는 행동"이라며 시위 참여자들을 맹비난했었다.그는 전날 스테판 로 홍콩 경무처장의 발언에 대해 덧붙일 말이 없다면서 "시위에 평화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지난 12일 시위를 '폭동'으로 부르면서 맹비난했던 로 경무처장은 전날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시위에 참여한 모든 사람이 폭동에 가담했다는 뜻은 아니다"며 한발 물러섰지만, 경찰을 공격한 시위 참여자에는 폭동 혐의를 적용한다는 의사를 굽히지 않았다.캐리 람 장관은 12일 시위 참여자들에게 사과할 것이냐는 질문에는 "부적절할 것"이라며 거부했으며, 시위 참여자들을 만날 것이냐는 질문에는 "장래에 젊은이들과 얘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만 답했다.캐리 람 장관은 "사회 갈등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는 한 범죄인 인도 법안을 재추진하지 않겠다"고 밝혔지만, 법안의 완전한 철회는 거부했다.사퇴 여부를 묻는 말에는 "제2의 기회를 얻길 원한다"고 답해 이 또한 거부했다.시민들에게 직접 사과했지만, '폭동' 발언에 대해 모른다고 발뺌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송환법의 완전한 철회 등을 거부하는 이 같은 사과가 야당과 시민단체의 반발을 가라앉힐지는 의문이다.범민주 진영은 19일 열리는 입법회에서 캐리 람 행정장관이 이끄는 내각에 대한 불신임안을 제출하겠다고 밝혀 공세의 수위를 높일 것을 예고했다.이번 홍콩 시위에서 가장 많이 쓰인 모바일 메신저 '텔레그램'에서는 송환법 완전 철회 등을 요구하는 온라인 청원 운동이 일어났다.이들은 ▲송환법 완전 철회 ▲12일 시위에 대한 '폭동' 규정 철회 ▲12일 시위 과잉 진압 책임자 처벌 ▲체포된 시위 참여자 전원 석방 등 4대 요구 사항을 내걸었으며, 이날 오후 5시까지 정부가 이에 답할 것을 요구했다.이 온라인 청원 운동에 동참한 누리꾼의 수는 7만5천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전해졌다.미국에 살고 있지만 이번 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홍콩으로 왔다는 마에브 로(31) 씨는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그녀(캐리 람 장관)는 진심으로 사과하는 것이 아니며, 말장난하고 있을 뿐"이라며 "이런 식으로 나간다면 300만 명의 시민이 거리로 뛰쳐나갈 것"이라고 말했다./연합뉴스
중국 정부는 200만 명의 홍콩 시민이 거리로 뛰쳐나와 캐리 람 행정장관(행정수반)의 사임을 요구했지만 이를 거부했다.루캉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17일 정례 브리핑에서 중국 중앙정부가 람 장관을 아직 지지하는지 질문을 받고 “중국 중앙정부는 행정장관과 홍콩 특별행정구 정부의 법에 따른 통치를 계속 확고히 지지할 것”이라고 말했다.루 대변인은 한정 부총리가 홍콩과 인접한 선전에서 은밀히 람 장관을 만났다는 보도와 관련해서는 외교부 소관 사항이 아니라는 이유로 답변을 피했다. 그는 또 홍콩 시민의 시위가 각자 의사에 따른 것인지 외국이 조종한 것인지를 묻는 말에 “외국 정부와 정치인들이 올해 2월 법안 개정을 시작하기로 했을 때부터 선동성 발언을 계속해왔다”며 미국을 포함한 외국에 화살을 돌렸다.베이징=강동균 특파원 kdg@hankyung.com
범죄인 인도법 개정안(중국 송환법)을 둘러싼 대규모 시위로 ‘아시아 금융 허브’로 자리잡은 홍콩의 입지가 뿌리부터 흔들린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 민주적인 사법시스템 안에서 금융 허브 위상을 누리던 홍콩이 점점 ‘중국화’되면서 비즈니스 여건이 악화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전문가들은 홍콩 민주주의가 후퇴하면 싱가포르가 홍콩을 대체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17일 블룸버그통신 등에 따르면 홍콩에서 정치적 불안이 커지자 다수 기업이 투자를 철회하거나 연기하는 등 홍콩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홍콩에서 930억달러(약 110조3000억원)의 자산을 운용하는 파인브리지인베스트먼트를 포함한 상당수 기업이 홍콩 시위를 이유로 최근 현지에서 계획했던 행사를 줄줄이 연기했다. 부동산개발업체 골딘파이낸셜홀딩스는 사회 동요와 경제 불안정을 이유로 14억달러 규모의 부지 입찰 계획을 접었다. 일부 기업들은 이미 사무소를 싱가포르 등지로 옮기는 방안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홍콩에서 싱가포르로 자금이 이탈하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일부 홍콩 재벌들은 홍콩의 정치적 리스크가 높아지자 재산을 해외로 옮기기 시작했다고 로이터통신이 보도했다. 홍콩의 한 자산가는 홍콩 씨티은행 계좌에서 싱가포르 씨티은행 계좌로 1억달러 이상을 송금한 것으로 알려졌다. 로이터는 “이제 시작일 뿐”이라며 “대부분 자산가들이 싱가포르를 도피처로 고려하고 있다”고 전했다.주요 다국적 기업이 홍콩에 아시아지역 본부를 두고 있는 것은 홍콩이 ‘법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중국과 별개로 독립적인 사법시스템과 자본시장 친화적인 금융시스템을 갖추고 있다는 얘기다. 거대 시장인 중국과 지리적으로도 가깝다.하지만 중국의 장악력이 확대되고 정치적 불안이 커지면 홍콩의 입지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기업들은 공산당과 정부가 사사건건 개입하는 중국 본토식으로 경영 환경이 바뀔 수 있다는 점을 걱정한다. 시장조사업체 블룸버그 인텔리전스는 “서방은 ‘중국의 홍콩화’를 기대했지만 현실은 홍콩이 중국처럼 바뀌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며 “홍콩의 자치권이 훼손되면 기업과 자본이 대거 이탈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세계 주요 도시의 금융 경쟁력을 평가하는 영국 지옌그룹의 평가에서 홍콩의 세계 금융 허브 순위는 3위로 4위인 싱가포르를 앞선다. 하지만 홍콩에 대한 중국 공산당 및 중앙정부의 영향력이 커지면 홍콩의 순위가 크게 하락할 것으로 보는 게 글로벌 금융계의 시각이다. 지옌은 금융 허브 순위를 다섯 가지로 평가하는데, 첫 번째가 비즈니스 환경이며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정치적 안정성이기 때문이다. 홍콩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집권한 이후 자치권과 정치적 자유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베이징=강동균 특파원 kd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