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
글로벌 전자업체인 A사가 중국 주하이에 새로 짓는 최신 시스템반도체 공장의 승패를 한국인 손에 맡겼다. 공장의 장비 선정과 라인 구성부터 제조공장 운영까지 한국 컨설팅사에 맡긴 것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서 오랜 기간 경험을 인정 받은 최진석 사장이 주인공이다. 장비 공급업체 선정을 위해 선전에 머물고 있는 최 사장은 지난 15일 한국경제신문과 단독 인터뷰에서 한국 반도체업계의 문제점을 개선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길과 중국 반도체 굴기의 전후 사정을 털어놨다. 그의 말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옮긴다. 그의 일부 주장은 본지의 논조와 다를 수 있음도 밝힌다.
"정부의 시스템 반도체 육성책, 중소업체 인력난 악화시켜"
얼마 전 정부가 공격적인 시스템 반도체 육성책을 내놨다. 삼성전자도 총 133조원를 투자하겠다며 여기에 호응했다. 이같은 투자에 대해 세액공제 방식으로 정부가 지원하는 규모는 22조원에 달할 전망이다.

시스템반도체 육성을 위한 정부의 노력은 높게 평가할만하다. 메모리 반도체 이후를 준비하는 삼성전자의 전략도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대기업과 중소업체로 양분된 시스템반도체 특유의 시장 구조를 이해하지 못하면 정부의 지원책이 중소업체에 해가 될 수 있다.

시스템반도체는 대기업이 할 수 있는 영역과 중소업체들이 영위하는 영역이 명확히 갈린다. 대기업들이 영위하는 영역은 막대한 연구개발비 투자와 미세화 수준이 높은 공정기술이 필요해 많은 자본을 오랫동안 투입해야 성공할 수 있다. 소품종 대량생산의 특징을 갖고 있어 본질적으로 메모리 반도체 시장과 비슷하다.

인텔이 사실상 독점하고 있는 PC의 CPU(중앙처리장치), 애플과 퀄컴이 만드는 스마트폰의 AP(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 퀄컴이 가장 앞서 있는 통신칩 등이 대표적이다. 소니가 대표주자인 CIS(이미지센서), LCD TV 등의 구동칩 등도 대기업이 영위하는 시스템반도체 영역이다.

CPU와 AP의 시장규모는 연 400억달러로 두 제품만 해도 반도체 호황 이전의 메모리반도체 전체 시장 규모(80억달러)와 맞먹는다. 통신칩은 150억~200억달러, CIS는 50억달러 정도의 시장을 갖고 있다. 기술력이 높은 업체가 독점 혹은 과점하는 전형적인 승자독식의 구조를 갖고 있기도 하다. 삼성전자의 시스템반도체 투자는 CIS에서 소니를 추격하는 것을 넘어 CPU와 AP에서도 성과를 내겠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충분히 의욕적으로 승부를 걸어볼 만하다. 정부 지원이 없었더라도 어차피 가야할 길이었다.

문제는 중소업체들이 영위하는 시스템반도체 영역이다. 해당 시장에는 대략 2만여개의 각기 다른 제품들이 있다. 각 제품의 연간 소비량은 크게는 1000억원대부터 작게는 10억원대에 불과하기도해 대기업들이 진입할만한 시장 규모가 되지 않는다. 해당 영역에는 전세적으로 수천개가 넘는 팹리스(반도체 설계업체)들이 촘촘히 들어서 경쟁하고 있다. 대부분 20~30명의 반도체 설계 기술자를 보유하고 있으며 적은 업체는 전체 직원 수가 10명 미만인 곳도 있다.

한국의 시스템반도체 경쟁력이 전반적으로 약하다고 하지만 대기업 영역에 비해 중소업체 영역이 특히 심각하다. 2018년 세계 팹리스 시장은 미국이 68%, 대만이 16%, 중국이 13%를 점유하고 있다. 한국의 비중은 1% 미만이다. 특히 2015년 700여개였던 중국 팹리스 업체 수가 올해 1700개를 돌파하는 등 성장세가 빠르다. 같은 기간 한국은 200개 안팎에서 답보 상태다.

정부가 양분된 시스템반도체 산업의 특성을 감안하지 않고 지원 방안을 내놓으면서 중소업체들은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다. 삼성전자가 시스템반도체 개발 인력을 2000명 추가 영입하기로 한데 따른 결과다. 새로운 시스템반도체 개발 인력이 하늘에서 떨어질 리 없다. 결국 상당 부분은 국내 중소 팹리스업체에서 근무하고 있는 이들로 채워지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고전하고 있는 국내 팹리스들의 인력난이 심화될 수 밖에 없는 구조다.

물론 정부는 앞으로 10년간 1만2000명 가량의 반도체 설계인력을 키워내겠다는 로드맵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는 결국 중장기적인 계획으로 당장 팹리스업체들의 인력난을 해결해주기 어렵다. 대기업과 중소업체 간 인력 안배를 위해 정부가 좀 더 세심한 지원안을 내놨어야 한다는 아쉬움이 드는 부분이다.

국내 팹리스 지원을 위해 정부 차원에서 추진할만한 사안은 따로 있다. 바로 20~40나노미터 수준의 미세화 공정을 갖춘 신규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업체) 설립을 민간에서 유도하는 것이다.

한국의 파운드리 산업은 극단적으로 양극화돼 있다. 10나노미터 초반의 미세화 공정을 갖춘 삼성전자 파운드리가 한쪽에 있고, 80~120나노미터 수준인 DB하이텍과 매그나칩반도체가 다른 한쪽에 있다. 전력 반도체와 일부 센서 등은 DB하이텍에서 소화가 가능하지만 30~40나노미터 수준의 공정이 필요한 많은 로직 제품을 생산할 파운드리가 국내에는 없다.

이같은 문제로 많은 한국 팹리스들은 대만이나 중국의 파운드리에게 제품 생산을 부탁한다. 하지만 호황기에는 자국 업체 제품 생산을 우선으로 하는 탓에 원하는 시기에 필요한 물량을 생산하기 힘들 때가 많다. 동일한 기술력을 갖고 있더라도 한국 팹리스가 대만이나 중국 업체에 뒤질 수 밖에 없는 구조다.

파운드리 분야에서 가장 높은 기술력을 갖춘 삼성전자가 순수 전자부품회사가 아니라는 점도 한계다. 자체적으로 스마트폰과 TV, 가전제품을 만들어 판매하는 삼성전자에 최신 설계 기술이 적용된 시스템반도체를 생산해달라고 경쟁자들이 주문하기는 어렵다. 파운드리 사업부를 완전히 분리해 고객의 비밀을 보장해 준다지만 새로 적용한 기술이나 노하우가 삼성전자 내 다른 사업부에 새어나갈 수 있다는 걱정하기 마련이다. 애플이 자사 AP를 대만 TSMC에서 전적으로 위탁 생산하는 이유는 기술력의 차이보다 삼성전자에 대한 불신에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 시스템반도체 산업 발전을 위해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미세화 수준이 20~40나노미터면서 관계사가 소비자용 제품을 만들지 않는 '순수 파운드리'다. 이같은 파운드리 사업을 새로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후보가 바로 SK하이닉스다.

D램 미세화가 10나노미터대로 떨어지면서 SK하이닉스의 생산라인 중 미세화 수준이 떨어지는 라인들이 하나씩 나타난다. 이를 전환하면 많은 투자 없이 파운드리 사업을 키울 수 있다. 내가 SK하이닉스 CTO로 일하던 시절 입안했던 장기 계획이기도 하다.

이는 SK하이닉스 입장에서도 유리하다. 현재 SK하이닉스는 삼성전자와 마찬가지로 시스템 반도체 경쟁력을 강화하겠다는 계획을 내놓고 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20여년간 막대한 자금을 투자한 삼성전자를 SK하이닉스가 따라잡기는 어렵다. 시스템반도체는 메모리에 비해 아날로그적 성격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품질이 조금 떨어지더라도 회사 내부 고객이 적지 않은 양을 구매해 줄 수 있는 삼성전자와 경쟁 환경 자체가 다르다.

미세화 공정에서 많은 노하우를 갖추고 있는 SK하이닉스가 파운드리 사업을 시작하면 해외 고객을 유치하는 것에도 유리하다. 삼성전자와 달리 생산을 위탁한 시스템반도체 기술이 유출될 가능성을 염려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반도체 산업은 10년을 앞서 준비해야 비로소 빛을 볼 수 있다. 시스템반도체 생태계 형성을 위해 필수적인 국내 파운드리 업체 강화를 정부가 신경 썼으면 한다. SK하이닉스가 충분히 매력을 느낄만한 각종 지원책이 나와야 할 것으로 본다.


◆최진석 사장은.
반도체 업계에서 10년 이상 일한 이들 중에 그의 이름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삼성전자가 막 메모리사업을 시작한 1984년 연구원으로 입사해 2001년 SK하이닉스로 자리를 옮겨 CTO(최고기술책임자) 등을 역임하고 2010년 회사를 나왔다. 업계에서 드물게 반도체 개발부터 제조·공정까지 전 과정을 섭렵하고 있는 인물이다. 한 번만 받아도 '임원 승진 보증수표'로 얘기되는 삼성 기술대상을 세 번 수상했다. 12인치 웨이퍼 가공기술 개발, 256메가,16메가 D램 개발의 공로를 인정 받은 결과다. SK하이닉스에서는 채권단의 자금 지원이 없는 가운데 기존 생산설비로 수율을 올리고 생산량을 늘렸다. 2006년 메모리 반도체 업계 최저 제조원가, 최고 생산량 확대 등의 기록을 내놨다. 이는 이건희 삼성 회장이 2007년 "어떻게 삼성전자가 하이닉스에 뒤쳐질 수 있느냐"며 반도체 경영진을 강하게 질책하는 것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후 반도체와 제조공정이 비슷한 솔라업계인 STX솔라, 한화큐셀 등에서 CEO로 일했다. 2015년 생산 및 공장 컨설팅업체를 세웠고, 미국 마이크론의 대만과 일본 공장의 생산성 향상을 컨설팅했다. 여기서 최 사장은 추가 설비투자 없이 20%의 생산성 향상을 이뤄내 세계 반도체 업계의 주목을 받았다. A사가 추진하는 공장을 맡긴 것은 이 같은 실적 때문이다.

선전=노경목 특파원 autonom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