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클린턴이 택소폰 불면 美 우울해지죠" 저격에도 1992년 대선 낙선85세 생일에 스카이다이빙한 후 "90살에 또 뛸거야"30일(현지시간) 별세한 '아버지 부시' 조지 H.W. 부시는 경제로 백악관의 주인이 됐다가 경제로 권좌에서 물러난 인물이다.그가 남긴 어록 중 가장 유명한 말은 1988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 당시 남긴 '제 입술을 보세요.더 이상의 세금은 없습니다'(Read my lips: no new taxes)라는 표현이다.전임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의 심각한 재정 적자와 무역 수지 적자에 따른 '쌍둥이 적자'로 경제에 암운이 드리운 상황에서 부시 전 대통령은 세금을 걷지 않겠다던 선거 운동 슬로건으로 공화당 지지자들을 규합해 마침내 대통령에 올랐다.그러나 경제 상황이 악화하면서 공약은 말 그대로 빈 약속이 되고 말았다.부시 전 대통령은 당선 2년 후에 공공지출액을 줄이지 않는 대신 세금을 인상하는 타협을 이루는 것으로 자신이 내건 약속을 저버렸다.결국, 꼬인 경제 정책 탓에 부시 전 대통령은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It's economy, stupid!)를 내건 빌 클린턴 민주당 후보에 무릎을 꿇었다.부시 전 대통령은 1992년 클린턴 전 대통령과의 선거 운동 과정에서 '빌 클린턴이 '택소폰'을 불면, 미국은 우울해지죠'(When Bill Clinton blows his taxophone, America will be singing the blues)라는 말로 클린턴 때리기에 나섰으나 효과는 미미했다.클린턴이 잘 부는 색소폰에서 색스(sax)와 세금(tax)의 영어 발음이 유사한 것과 음악 장르인 블루스의 블루(blue)에 '우울한'이라는 뜻이 담긴 것을 활용한 말장난으로, 고소득층의 증세를 주장한 클린턴을 에둘러 비판했다.다음은 그가 남긴 주요 어록이다.▲ '나는 미래를 불신하지도, 무엇이 앞에 놓여 있는지도 두려워하지 않는다.우리의 문제는 크지만, (그것을 해결할) 우리의 마음은 더 넓다.우리의 도전은 위대하지만, 우리의 의지는 더 위대하다.'(1989년 1월 대통령 취임 기자회견에서)▲ '오늘 졸업식 행렬이 길면 길수록, 내일 실업자의 행렬은 짧아질 것이다.'(1989년 2월 의회 합동연설에서)▲ '어떠한 세대도 역사를 피해갈 순 없다.'(1989년 12월 텍사스 A&M 대학교 졸업 연설에서)▲ '브로콜리를 좋아하지 않는다.어렸을 적 어머니가 브로콜리를 억지로 먹으라고 할 때부터 좋아한 적이 없다.이제 미국의 대통령으로서 브로콜리를 더는 먹지 않겠다.' (1990년 5월 기자회견에서. 부시 전 대통령은 브로콜리를 끔찍하게 싫어해 전용기 식단에서도 이를 뺐다.후임인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2013년 '어린이를 위한 국빈만찬'에서 브로콜리를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라고 밝혀 대조를 이뤘다.)▲ '냉전 종식은 모든 인류의 승리다.1년 반 전에 독일에서 나는 우리의 목표를 유럽 전체의 자유라고 천명한 바 있다.오늘 밤 독일은 통일됐다.유럽은 완전히 자유로워졌고, 미국의 리더십은 이를 가능케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990년 10월 3일 독일 통일 직후 연설에서)▲ '역사적인 순간이다.우리는 지난해에 냉전과 갈등의 오랜 시기를 끝내고 위대한 진전을 이뤘다.이제 우리 앞에 우리와 미래의 세대를 위해 새로운 세계 질서를 구축할 기회가 생겼다.새로운 세계는 정글의 법칙이 아닌 법칙이 모든 나라를 지배하는 세상이다.우리가 성공을 거두면, 믿음직한 유엔(국제연합)이 평화 유지의 약속을 실현하는 새로운 질서의 세계를 만난다.우리는 이라크 국민과 싸우지 않는다.이 갈등에서 붙잡힌 많은 무고한 사람들의 안전을 기원한다.' (1991년 1월 17일 걸프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미국 주도 다국적군의 이라크 폭격을 발표하면서. 걸프전은 4월 7일 다국적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걸프전이 1991년에 끝나 좋은 것 중 하나는 베트남전 참전 용사들이 걸프전 참전 용사들과 함께 행진하는 것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1991년 걸프전 종료 후)▲ '나만의 강한 의견을 갖고 있지만, 언제나 그것에 동의하는 건 아니다.'(1992년 11월 음악잡지 '스핀' 인터뷰에서)▲ '우리 집 개 밀리가 두 멍청이보다 외교 문제에 대해 더 많이 안다.'(1992년 재선 운동 중 민주당의 대통령·부통령 후보인 빌 클린턴·앨 고어를 비난하며. 경제 정책은 망쳤지만, 외교 문제에 대해서는 경험이 짧은 상대 당 후보보다 훨씬 경륜이 풍부하다는 점을 강조한 말)▲ '나보다 아들에 대한 비판을 읽을 때 더욱 안 좋다.'(퇴임 후. 제43대 미국 대통령에 오른 아들 조지 W(워커) 부시에 대한 비판을 접하고 나서.)▲ '난 알록달록한 양말을 좋아해. 난 '양말 맨'이다.'(퇴임 후. 알록달록 귀여운 양말을 선호하는 이유를 묻자.)▲ '90살에 또 뛸거야.'(2009년 85세 생일 때 스카이다이빙에 성공한 뒤.) '낙하산 타고 내려오기 좋은 날이군.(2014년 90세 생일 때 스카이다이빙 직전. 부시 전 대통령은 75세 생일부터 5년 간격으로 스카이다이빙으로 생일을 자축했다.)/연합뉴스
전술핵 철수로 '한반도 화해무드' 뒷받침역사적 몰타회담서 미·소 냉전종식 선언…재임 4년간 2차례 국회 연설1일(현지시간) 별세한 미국 41대 조지 W.H.부시 전 대통령의 재임기(1989~1993년)는 한반도 정세의 급변기였다.그 변화의 중심에는 부시 전 대통령이 있었다.1989년 12월 지중해 몰타에서 이뤄진 미·소 정상회담은 '동서 냉전 해체'의 신호탄이었다.옛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 공산당 서기장을 만난 부시 전 대통령은 '동서 협력시대'를 언급하면서 탈(脫)냉전을 선언했다.이듬해 10월 동서독이 통일됐고, 부시 전 대통령은 "냉전 종식은 모든 인류의 승리"라며 "유럽은 완전히 자유로워졌고, 미국의 리더십은 이를 가능케 하는 데 중요한 노릇을 했다"고 강조했다.글로벌 화해 무드는 노태우 정권의 이른바 '북방외교'를 촉진하는 기폭제가 됐다.노태우 정부는 1990년 옛 소련(러시아)과, 1992년 중국과 잇따라 수교했다.1991년 9월에는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이 이뤄졌다.주한미군의 전술핵 철수는 한반도 안보지형의 또 다른 전환점이었다.부시 전 대통령은 1991년 소련과의 '전략무기 감축 협정'(START)을 극적으로 타결했고, 그 연장 선상에서 주한미군에 배치된 전술핵무기를 철수시켰다.당시 북한에 핵무기가 없던 상황에서 주한미군 전술핵이 철수하면 한반도 비핵화가 이뤄진다는 논리가 나왔고, 노태우 전 대통령은 1991년 11월 '한반도 비핵화'를 선언했다.이는 남북 화해, 불가침, 교류협력 등의 내용을 담은 남북기본합의서 채택으로 이어졌다.부시 전 대통령은 4년 재임 기간, 두 차례 국회 연설을 진행한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첫 방한은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7·7 선언 이후 남북 대립이 상대적으로 누그러진 상황에서 이뤄졌다.취임 직후인 1989년 2월 여의도 국회에서 "우리는 북한 쪽으로 다리를 놓으려는 노태우 대통령의 평화적인 제안을 적극적으로 지원한다"며 "노 대통령과 긴밀히 협조해 북한을 실질적·평화적이고 생산적인 대화로 유도할 것"이라고 강조했다.임기 후반기인 1992년 1월 국빈 방한 기간에는 북한이 핵시설 사찰을 수용하고 의무를 이행하면 한미 양국의 팀스피릿(Team Spirit) 군사훈련을 중지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특히 남북 공동 비핵화 선언을 상기하면서 굳건한 한·미 동맹의 발전과 한반도 안전을 역설했다.1993년 3월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선언으로 촉발된 '제1차 북핵 위기'로 한반도 기류가 급속히 얼어붙기 이전까지 직간접적으로 '한반도 데탕트'를 뒷받침한 셈이다./연합뉴스
향년 94세…아들 부시와 美 두 번째 '父子 대통령'이자 역대 최장수 대통령고르바초프와 정상회담, 걸프전 승리 주역…경기 침체·재정 적자로 재선 '고배'4월 세상 떠난 '73년 해로' 아내 곁으로…트럼프·클린턴 등 각계 애도 물결탈냉전의 세계사적 전환기에 동서화합의 주역으로 활약하고 걸프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아버지 부시' 조지 H. W. 부시 전 미국 41대 대통령이 별세했다.향년 94세.부시 전 대통령은 30일(현지시각) 밤 10시 10분 텍사스 주 휴스턴의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부시 가족의 대변인인 짐 맥그래스의 성명을 인용해 AP·로이터통신 등 외신들이 보도했다.아들 조지 W. 부시 전 미 대통령은 트위터로 발표한 성명에서 "젭과 닐, 마빈, 도로와 나는 사랑하는 아버지가 경이로운 94년을 보낸 뒤 돌아가셨음을 슬픈 마음으로 발표한다"면서 "그는 아들·딸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아버지이자 최고의 인물이었다"고 강조했다.파킨슨병으로 투병해온 부시 전 대통령은 지난 4월17일 73년간 해로해온 부인 바버라 여사가 9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뒤 입원을 반복하며 치료를 받아오다가 7개월여 만에 그 곁으로 갔다.그는 역대 미국 대통령으로서 최장수 기록을 세웠다.1966년 텍사스 주 하원의원 당선으로 정계에 입문해 유엔 주재 미국 대사와 국무부 베이징연락사무소장, 중앙정보국(CIA) 국장 등을 지낸 부시 전 대통령은 지난 1988년 대선에 공화당 후보로 출마, 민주당 후보였던 마이클 듀카키스 매사추세츠 주지사를 누르고 당선돼 이듬해 대통령에 취임했다.이라크에 침략당한 쿠웨이트를 해방한다는 명분으로 시작한 1991년 '걸프 전쟁'에서 약 43만 명의 대군을 파병해 승리를 거둔 것은 부시 전 대통령의 치적으로 거론된다.'사막의 폭풍'이라는 작전명으로 진행된 걸프전에는 33개국 약 12만 명의 다국적군이 참전했다.한국도 당시 군 의료진과 수송기 등을 파견하며 다국적군에 참여했다.부시 전 대통령은 거대한 세계사적 변화의 중심에서 4년 임기를 보내며 냉전종식을 선언하는 주인공이 됐다.'거대 공산 제국'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이 붕괴하고 독일 통일을 시작으로 동유럽이 잇달아 자유화의 물결을 탔다.부시 전 대통령은 탈(脫) 냉전의 분위기가 싹트던 시기에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1989년 12월 미·소 정상회담을 통해 40여 년에 걸친 냉전의 종식과 동서화합을 선언했다.그는 이라크전 승전보 등으로 가파른 지지도 상승을 보였지만, 이후 경기 침체와 만성적인 재정 적자 등 국내 경제적 요인으로 민심을 잃으면서 1992년 대선에서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라는 슬로건을 내건 민주당 빌 클린턴 후보에게 져 재선에 실패했다.대통령 후보 수락 당시 "제 입술을 보세요 더 이상의 세금은 없습니다"라고 호언했으나 대통령 당선 후 세금 인상을 결정하면서 약속을 저버렸다는 역풍을 맞았다.그러나 2000년 대선에서 장남 조지 W. 부시가 백악관 입성에 성공하면서 2대 대통령 존 애덤스에 이어 역대 두 번째 '부자(父子) 대통령'의 기록을 세우며 케네디가(家) 못지않은 정치 명문가로 자리매김했다.바버라 여사는 남편과 아들을 대통령으로 키워낸 영부인으로 미국인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고 차남 젭도 플로리다 주지사를 지냈다.부시 전 대통령은 재선에 실패한 이후로는 고향인 텍사스 주로 돌아가 노후를 보냈다.2004년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피해를 본 이재민을 위한 성금 모금을 위해 클린턴과 손잡기도 했다.부시 전 대통령은 2005년엔 "내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빌 클린턴과 같이 일할 줄 누가 알았겠느냐"고 말하기도 했다.고령에도 75세와 80세, 85세, 90세를 기념해 스카이다이빙을 하며 노익장을 과시했고 알록달록한 양말을 즐겨 신는 '귀여운' 모습도 선보였다.그의 별세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등 미국 정치권을 비롯한 각계에서 애도가 잇따르고 있다.트럼프 대통령은 "건강한 판단과 상식, 흔들림 없는 리더십으로 우리나라와 세계를 이끌어 냉전을 평화적인 승리로 종식했다"며 업적을 기렸다.1992년 대선에서 부시 전 대통령의 적수였던 클린턴은 "나는 그의 타고난, 진심 어린 품위와 부인 바버라와 가족에 대한 헌신에 항상 감동받아왔다"며 그와의 우정에 감사를 표했다.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도 트위터를 통해 "미국은 애국적이고 겸손한 종복을 잃었다"며 슬픔을 표했다.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