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모시 브룩 지음 / 조영헌, 손고은 옮김
너머북스 / 420쪽│2만8000원
기증자의 이름을 따 ‘셀던 지도’로 불린 이 지도는 여러모로 특이했다. 수작업으로 그린 지도에는 중국의 연안과 동남아시아의 섬들, 한반도와 일본까지 묘사돼 있었다. 육지는 파란색과 고동색으로 칠한 산들로 장식됐고, 점묘법으로 각종 나무를 묘사했다. 지도 곳곳에 점 찍은 도시와 항구의 이름은 한자로 표기됐고, 바다의 항구와 항구 사이에는 자로 그린 듯한 직선이 교차했다. 명대(明代)의 지도들이 중국을 중심에 놓고 부각하는 대신 나머지는 주변에 배치한 것과 달리 지도의 중심이 남중국해였다. 육지가 아니라 바다를 중심으로 그린 지도였다. 게다가 현대 지도에 익숙한 눈으로 봐도 전혀 낯설지 않을 만큼 지형이 정확했다.
중화주의가 창궐했던 당시, 도대체 누가, 왜 이런 지도를 만들었을까. 지도는 무엇을 의미하고 있을까. 저자는 중국과 영국을 오가면서 특유의 스토리텔링 기법으로 의문의 실체에 다가선다.
먼저 셀던이 지도를 수집하고 도서관 사서 토머스 하이드가 중국 난징 출신으로 1683년부터 8년 동안 유럽에 체류했던 중국인 심복종의 도움을 받아 셀던 지도에 주석을 달았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영국을 중심으로 한 당시 유럽의 지적·정치적 취향과 스튜어드 왕조의 정치적 분위기, 해상무역이 발달하면서 해상 영유권과 항해권을 둘러싸고 네덜란드와 영국, 포르투갈, 스페인 등이 대립한 상황 등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17세기는 해양이 격변을 겪던 시기였다. 1494년 토로데시우스 조약으로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사실상 양분하던 바다에 진입하려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새로운 주장을 제기했다. 《자유로운 바다》의 저자이자 라틴어 이름 그로티우스로 더 잘 알려진 네덜란드 학자 하위흐 더 흐로트를 통해 누구나 자유롭게 바다를 왕래할 수 있다고 한 것. 이에 대해 셀던은 영해권을 놓고 네덜란드와 대립하던 영국의 찰스 1세를 위해 《닫힌 바다》라는 책을 써 배타적 지배를 받는 공간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이는 영국의 바다 주권이 북해 전역으로 확대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명나라 시대 중국을 둘러싼 바다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오래전부터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상인들이 닦은 무역로에 유럽인들이 등장해 남중국해는 하나의 교역체계로 통합돼 간다. 이 과정에서 열린 바다냐, 닫힌 바다냐의 대립이 다시 불거졌다. 또한 동서양의 지도가 병용과 혼용, 교류를 거듭하며 정확도를 높여갔다. 셀던 지도에 등장한 나침반의 의미를 따지고, 유럽에서 해도의 정확성을 높이기 위해 등장한 포르툴라노 지도와의 비교를 시도한 것은 그런 까닭이다.
저자는 셀던 지도의 제작자가 유럽의 포르툴라노 지도를 보고 모방했거나 그 원리를 활용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아울러 지도에 그려진 나침도 밑의 눈금자는 단순한 장식용이 아니라 실제로 축적을 반영했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475만분의 1 축적으로 그려진 이 지도에서 자의 1촌(寸·3.75㎝)은 배가 4노트의 속도로 하루를 항해한 거리라는 것이다.
지도에 그려진 항로들의 정확성도 놀랍다. 지도에 등장하는 항로는 크게 동쪽으로 필리핀과 향료제도까지 연결하는 동양 노선, 베트남과 인도네시아를 거쳐 인도양으로 향하는 서양 노선, 류큐·고베·나가사키로 이어지는 북양 노선이 방향 표시와 함께 그려져 있는데, 모든 항로의 출발점은 중국 푸젠(福建)성 장저우와 취안저우 연안이다.
특히 중국의 전통적인 세계관인 천원지방(天圓地方·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을 평면에 구현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나타나는 ‘왜곡현상’이 남중국해에 집중되도록 한 데서 저자는 이 지도의 현대적 의미를 찾는다. 수많은 암초로 가득한 이 지역은 당시 선장들이 기피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정확하지 않아도 됐던 것. 하지만 오늘날 중국이 주변국들과 해상 영토분쟁을 벌이고 있는 핵심 지역이 바로 이곳이라는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서화동 문화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