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은 호젓한 여유와 감성을 느끼기엔 너무 먼 여행지다. 왕복 이동시간만 24시간에 육박한다. 장기 일정을 짜지 않는 이상 유럽 도시 곳곳을 깨알같이 둘러보기란 쉽지 않다. 작은 대륙 안에 수많은 언어는 물론 전혀 다른 민족, 역사, 문화가 옹기종기 모여 있어 짧은 휴가 기간에 모든 걸 담아오기란 쉽지 않다.

[책마을] 느릿느릿 걷는 유럽여행… 또 다른 나를 마주하다
정여울 여행작가가 쓴 《내성적인 여행자》는 이런 이유로 유럽 여행을 주저하는 여행객에게 던져주는 작은 나침반이다. 그가 유럽의 36개 도시를 거닐며 담아낸 여행기지만 일반적인 여행책과는 성격이 다르다.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이동하는 데 대략 몇 시간이 걸린다는 내용이 책에 나오는 유일한 여행정보다. 대신 자신이 이 여행지를 왜 좋아하게 됐는지, 10년 전 왔던 이곳을 다시 찾은 이유가 뭔지를 유럽의 문학, 역사, 철학, 미술, 음악 등과 엮어 하나씩 풀어간다.

책은 심오한 자기계발서나 심리치유서에서 말하는 해결법을 제시하지 않는다. ‘여행’이라는 친숙한 소재를 통해 크고 작은 일상에서의 성찰을 조심스럽게 꺼내들며 읽는 이의 마음을 어루만져준다.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너무 빨리 걷지 말라, 영혼이 따라올 시간을 주어라’는 아프리카 속담을 언급한다. 그러면서 첫 번째 여행지로 독일 뉘른베르크를 소개하며 특별한 계획 없이 돌로 만들어진 길을 내내 맨발로 걸으며 느꼈던 골목의 정취를 이야기한다.

어떤 목적지를 향해 찾아가는 여느 여행과는 다른, 그저 느긋하게 여행을 떠나는 과정 자체에서 찾을 수 있는 즐거움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런던과 파리 같은 대도시에선 우리가 알고 있던 기존 관광지가 아닌, 느릿느릿하고 평범한 일상의 풍경 속에서 새로운 성찰을 끌어낸다. 영국 던디나 스페인 콘수에그라와 같은 소도시에선 대도시에선 발견할 수 없었던 새로운 정취를 안겨준다.

저자는 한번 집에 틀어박히면 1주일 동안 영화와 책만 보며 지낼 수 있는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 같은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하지만 그 역시 여행을 시작하면 길을 묻기 위해, 버스를 타기 위해 어렵게 타인에게 말을 걸어야 했다. 내성적인 사람마저도 한순간 외향적인 존재로 바꿔 놓는 크고 작은 모험이야말로 여행이 지닌 묘미라고 역설한다.

《내성적인 여행자》의 여행지가 유럽에만 국한된 점은 아쉽다. 여행에서 느끼는 여러 가지 감상과 자기 성찰은 유럽이 아니더라도 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에서도 같은 크기와 무게로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왠지 ‘내성적인 아프리카 여행자’ ‘내성적인 인도 여행자’와 같은 후속작이 나올 것 같은 기대도 해보게 된다.

짧은 시간 빠르게 훑어내려가는 벼락치기 여행이 아닌, ‘고구마’처럼 천천히 소화되는 슬로푸드 같은 여행도 나름 묘미가 있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읽는 내내 두껍고 빡빡한 여행책은 놔두고 이 책 한 권 들고 훌쩍 런던행 비행기 티켓을 끊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정여울 지음, 해냄, 392쪽, 1만6800원)

은정진 기자 silv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