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크기 전에 배 가르지 않는 원칙' 있는 미국처럼… 담대한 정책으로 '혁신 싹' 틔우게 해야
몇 해 전 중소기업중앙회를 취재할 때 일입니다. 중기중앙회가 규제개혁 자료집을 냈습니다. 한 기업의 사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화학업체 한 곳이 규제 때문에 문을 닫기 직전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환경규제를 풀어달라는 청원이었습니다. 자료 작성자에게 연락해 자세한 상황을 알아봤습니다. 그는 머뭇거리며 말했습니다. “자료집에는 넣었지만 기사는 쓰지 말아달라. 그 동네에서 많은 사람이 암에 걸려 문제가 됐다.” 자료집 뒤쪽에 넣은 이유였습니다. ‘규제 완화가 약이 될 때도 있고, 독이 될 때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프랑스의 의학 패권

다음 얘기는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789년 프랑스혁명 직후 현대의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합니다. 해부학과 정신의학이 의학의 일부가 되고, 르네 라에네크는 청진기를 발명했습니다. 심장 소리를 파악하고 그 소리를 부검 때 발견한 해부학적 증상과 연결시켰습니다. 이런 발전은 혁명 이후 프랑스 왕실이 의료와 부검에 가하고 있던 각종 제약을 제거한 것이 계기가 됐습니다. 규제 완화가 프랑스를 의학강국으로 이끌었습니다. 이 창조적 분위기가 사라진 뒤 프랑스는 ‘정신분석’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오스트리아에 의학의 주도권을 넘겨주게 됩니다.

◆규제 전에 산업 성장이 우선

규제는 이런 것입니다.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지난주 오픈이노베이션(개방형 혁신) 시리즈를 게재했습니다. 벤처 생태계에서 대기업이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를 다뤘습니다. 핵심 내용은 이랬습니다. ‘창업이 활성화되려면 벤처를 세워 돈을 많이 번 사례가 쏟아져 나와야 한다. 그러려면 한국 사회에서 가장 많은 자산을 가진 대기업이 벤처를 인수해야 한다. 그 걸림돌을 제거할 필요가 있다.’

걸림돌은 다양한 규제입니다. 파는 측(벤처)도, 사는 측(대기업)도 모두 원하는 일입니다. 대기업의 문어발식 확장을 걱정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벤처가 커서 시장에 악영향을 끼치기 시작할 때 규제를 논해도 늦지 않습니다.

◆미국 산업 패권의 비결

미국의 규제에 대한 원칙은 참조할 만합니다. 소련이 인공위성 스푸트니크호 발사에 성공하자 미국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당시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인류의 달 착륙을 목표로 하는 아폴로 계획을 발표합니다. 자유로운 연구와 실험이 진행됐습니다. 빌 클린턴 정부 당시 앨 고어 부통령은 ‘정보고속도로’를 주장했습니다. 이 고속도로를 정보기술(IT) 기업들이 질주했고, 고성장기가 찾아왔습니다. 버락 오바마는 난치병을 치료하기 위해 뇌 지도를 완성하자며 ‘뇌 프로젝트’를 역설했습니다. 국가 과제가 떨어지면 그곳은 규제 없는 자유로운 연구가 진행됩니다. 미국의 힘은 방향성을 정해 산업을 키우고, 그 산업이 크기 전에는 배를 가르지 않는 암묵적 원칙에서 나오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혁신성장의 실체를 찾아서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해 “성장이 빠졌다”고들 합니다. 이 비판에 대한 정부의 답은 혁신성장입니다. 그 실체는 물론 혁신적 기업이 많이 나오는 것입니다. 속물스럽지만 큰돈을 번 창업자들이 나오고 이들이 또 창업을 하고, 이를 본 젊은이와 직장인들이 창업을 꿈꾸게 하는 것 아닐까 합니다. 이 지점에서 대기업이 역할을 할 수 있게 하자는 얘기입니다. 벤처기업 인수의 걸림돌을 모조리 걷어내 대기업이 혁신성장의 파트너가 될 길을 열어주는 시도가 필요합니다.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하면 그때 가서 대기업을 다그쳐도 늦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을 해봅니다. 지금의 경제상황은 담대한 정책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중소기업부장 juny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