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말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기관투자가의 주주권 행사 지침) 도입을 앞두고 재계와 금융투자업계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다. 정부가 635조원에 달하는 국민연금 기금을 독립적이고 전문적으로 운용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고, 기업 압박과 공공 투자 등 정책 수단으로 활용하려고 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정부가 국민연금 기금 운용에 직접 영향력을 행사하는 상황에서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를 강화하면 민간 기업에 대한 경영 간섭이 더 심해질 것이란 지적이다. 공석이 된 지 1년이 넘도록 최고투자책임자(CIO)인 기금운용본부장을 뽑지 못하고 있는 것도 이런 정권의 의도를 실행으로 옮길 입맛에 맞는 후보를 찾지 못했기 때문 아니냐는 얘기가 나온다. 한 재계 관계자는 “국민연금이 정작 자신의 지배구조는 엉망이면서 남(기업)의 지배구조에만 ‘감 놔라 배 놔라’ 하겠다는 것 아니냐”며 “이대로 가면 국민연금이 국민의 신뢰를 더욱 잃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연금 635조 지킬 독립성은 뒷전… '잿밥' 주주권에만 꽂힌 정부
주주권 행사 강화는 속전속결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지난해 말 열린 기금운용위원회 직후 기자들과 만나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은 일러야 내년 하반기”라고 말했다.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을 들어 최종안에 반영하고 법 제도를 정비하는 등 충분한 시간을 두고 준비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복지부는 태도를 바꿔 이달 말을 ‘데드라인’으로 삼고 속전속결로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을 밀어붙이고 있다.

금융위원회도 국민연금이 주주권을 쉽게 행사할 수 있도록 자본시장법을 개정하는 등 전방위 지원에 나섰다. 복지부는 오는 17일 공청회를 거친 뒤 26일께 기금운용위원회를 열어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안건을 통과시킨다는 방침이다.

당장 올해 하반기부터는 기업가치를 훼손하는 사건이 발생하면 경영진에 대화를 요청하고 의결권 행사와 연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대한항공 오너 갑질 사태’와 같은 사건이 발생하면 국민연금이 경영진에 오너 일가 사퇴를 요구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직접 주주총회에서 의결권을 행사해 해당 인사를 이사회에서 제외시킬 수 있게 된다.

국민연금이 주주대표소송을 제기할 법적 근거도 마련하기로 했다. 또 의결권 행사의 결정 사항은 주총 이전에 공지하기로 했다. 그동안은 시장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사후 공지를 원칙으로 해왔다. 내년부터 의결권 행사를 위임받을 예정인 위탁운용사들이 국민연금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을 것으로 관측된다.

기금운용 독립성은 후퇴

기관투자가의 주주권 행사 강화는 세계적인 추세다. 문제는 국민연금이 선진 연기금들과 달리 정부의 직접적인 지배 아래 있다는 점이다. 국민연금 기금 운용의 최고의사결정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는 국무위원인 복지부 장관이 위원장을 맡고 있다. 기금운용위원회를 실무적으로 보좌하는 기금운용실무평가위원회도 복지부 차관이 위원장이다.

반면 캐나다연금(CPP)은 기금운용 조직인 캐나다연금투자위원회(CPPIB)에 정부 인사는 한 명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해놨다. 네덜란드, 스웨덴, 노르웨이 등 유럽의 연기금, 국부펀드들도 정부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자유롭다.

지난해까지 의결권은 기금운용본부가 행사하되 판단이 곤란한 경우에만 의결권행사전문위원회에 부의했다. 그러나 복지부는 올해 초 의결권전문위가 원하는 안건은 모두 의결할 수 있도록 규정을 바꿨다. 의결권 행사의 주체가 전문 조직인 기금운용본부에서 복지부 산하 위원회로 옮겨간 셈이다. 이 위원회는 하반기에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로 확대 개편돼 의결권뿐 아니라 주주권까지 행사하게 된다.

외면받는 기금운용본부 “시스템 전복 위기”

국민연금은 독립성뿐 아니라 전문성에서도 낙제점을 받고 있다.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은 투자에 대해 지식과 경험이 전무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사용자단체, 근로자단체, 지역가입자단체 등 각계 대표로 위원회를 구성했기 때문이다. 일부 위원은 급변하는 시장 환경에 맞게 투자 전략을 수립하는 데 오히려 걸림돌만 된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최광 전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은 “CPPIB의 경우 9개의 주 의회가 추천하는 이사로 구성되는데 모든 이사는 금융투자와 기업재무 전문가들”이라며 “국민연금도 각 지방자치단체가 추천하는 전문가들로 기금운용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들이 위원장을 호선으로 선출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최 전 이사장은 이어 “독립성과 전문성을 위해 복지부 장관은 기금운용위원회에서 손을 떼는 게 맞다”고 강조했다.

기금운용본부도 금융업계 평균에 못 미치는 보상 체계와 정치에 휘둘리는 지배구조 등으로 실무진 이탈이 심각하다. 한 생명보험사 최고투자책임자(CIO)는 “세계 3대 연기금인 국민연금의 위상을 생각하면 최고의 인재들이 몰려야 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국민연금 출신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문재인 정부 공약 중 주주권만 강화되고 독립성·전문성이 뒷걸음질친다면 국민연금 기금운용 시스템 자체가 전복 위기를 겪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유창재 기자 yooco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