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에서 멀티 K뷰티 스토어  ‘BEAUTY IN SEOUL'을 운영하고 있는 에릭슨 강/ 사진=이승현 한경텐아시아 기자
필리핀에서 멀티 K뷰티 스토어 ‘BEAUTY IN SEOUL'을 운영하고 있는 에릭슨 강/ 사진=이승현 한경텐아시아 기자
화장품 유통사 대표인 에릭슨 강은 필리핀에서 ‘BEAUTY IN SEOUL'이라는 멀티 K뷰티 스토어를 운영 중이다. 한국 화장품 50여개 브랜드를 올리브영 같은 콘셉트로 운영 중인 것. 그는 제3시장이라고도 불리는 동남아시아와 필리핀에서 K뷰티를 이끌고 있다. ‘BEAUTY IN SEOUL’은 필리핀 내 20개 매장에서 모두 흑자를 내고 있다. 그는 “동남아는 전혀 어려운 시장이 아니다. 화장품을 필리핀 시장에 맞게 타기팅(Targeting)한다면 중국 시장보다 훨씬 안정적이고 많은 수익을 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지난 해 한국을 강타한 중국 사드 역풍은 국내 화장품업계에도 큰 손실을 안겼다. 최근 한중 관계개선 등의 움직임이 엿보이면서 중국 시장 회복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고는 있지만 아직 안심할 수 없다. 에릭슨 강이 “화장품 업계는 사드 교훈을 발판 삼아 중국 의존도를 낮추고 ‘신시장’을 개척해야 한다. 눈을 조금만 돌려 필리핀을 포함한 아세안 마켓에 관심을 가져야 할 때”라고 역설하는 이유다.

혁신적인 생각과 과감한 도전으로 성공을 이룬 에릭슨 강을 서울시 중구 청파로 한국경제신문사에서 만났다.


필리핀에서 사업을 하게 된 계기는?
필리핀과 처음 인연을 맺은 건 12년 전이다. 부동산 개발과 관련해 효성그룹 필리핀 법인장으로 처음 갔다. 3년 간의 프로젝트가 끝나고 한국 본사로 들어와야 했지만 현지에서의 인맥 등 좋은 비즈니스 조건을 보고 사표를 냈다. 그 뒤 현지에 있는 지인들과 함께 컨설팅 사업을 시작했다. 화장품 회사가 주 고객이었다. 에뛰드, 스킨푸드, 토니모리 브랜드를 필리핀에 진출시키는 일을 했다. 그러다 자연스레 화장품 사업에 매력을 느껴 개인 사업을 시작했다. ‘올리브영 같은 매장을 필리핀에 만들어야겠다’라는 생각으로 시작한 게 ‘BEAUTY IN SEOUL'이고 그게 성장해 현재 20개 정도 매장을 냈다.

왜 화장품에 관심을 갖게 됐나?
화장품 향기가 좋았다. 여성을 상대로 하는 것에도 매력을 느꼈다. 무엇보다 이윤이 좋다.(웃음) 그래서 다른 어떤 비즈니스보다 사업하는 재미가 있다.

부동산 개발업을 하다가 화장품 사업을 시작하는 과정이 힘들었을 것 같다.
원래 광고회사를 다녔다. 그때부터 화장품 관련 고객들이 많이 있었고, 광고를 많이 했다.

외국에서 사업을 하다보면 문화적 차이가 심할 텐데.
제일 큰 차이는 사람이다. 필리핀 사람들은 노는 게 먼저다. 한국 사람들은 일을 하다가 힘들면 잠시 휴식시간을 갖지 않나. 그들은 노는 데 돈이 필요해서 일을 한다. 집안일이 제일 중요해서 무슨 일이 생기면 반드시 회사를 빠진다. 입학식, 작은아버지 생일 등...(웃음) 그거 가지고 뭐라 할 순 없다. 그래서 행복지수는 우리나라 보다 높은 것 같다. 이 점은 나도 많이 배운다.

처음부터 사업이 순탄하진 않았을 것 같다.
사실 ‘BEAUTY IN SEOUL'이 첫 번째 프로젝트는 아니다. 'LIPSTICK PLEASE'라는 이름으로 큰 스토어를 했다. 그때는 실패했다. 매장 3개를 3년 운영하고 접었다. ’BEAUTY IN SEOUL'은 두 번째 프로젝트다.

'LIPSTICK PLEASE'의 실패 요인은 뭐였나?
매장은 크고 화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겉멋만 들었던 거다. 그러면서 과도하게 투자했다. 멋있다고 매출이 잘 나오는 시장이 아닌데 효율보다는 보여주는 것에 치중하다 보니 수익이 안 나오더라. 지금 20개 매장은 전부 키오스크(역전·광장 등에서 신문·잡지·꽃 등을 파는 매점) 형태다. 보통 백화점 입구에 들어가면 바로 보이는 가장 좋은 자리에 포진되어 있는데 크기는 3.3㎡부터 기껏해야 8㎡ 남짓이다. 작고 효율적이어야 매출이 잘 나온다. 모두 실패로 얻은 교훈이다.

지금은 회사 규모가 꽤 커졌을 거 같다.
판매사원만 60명이다. 본사 직원 20명까지 합치면 80명 정도다.

매장을 더 늘릴 계획이 있는지.
당연하다. 빨리 50개를 만들고 싶다. 장기적으로는 직접 브랜드도 만들고 싶다. 그러려면 매장이 50개 정도 있어야 할 것 같다.

언제 정도면 가능할까?
3년 정도 생각하고 있다. 2020년이면 가능하지 않을까.

일을 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시하는 가치는?
나는 즐겁게 일하는 걸 좋아한다. 필리핀 사람들에게 한국의 선진적 경영문화를 알려준다는 생각으로 일을 하고, 희열을 느낀다. 물론 쉽지는 않다. 대부분의 한국 기업이 동남아에서 실패하는 이유는 결과가 빨리 나오지 않아 못 참고 돌아가기 때문이다. 물론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보통 필리핀에서 생활 하는가?
그렇다. 한국에는 1년에 네 번 정도 온다. 보통 브랜드 계약, 투자, 신규 비즈니스 같은 게 있을 때다.

필리핀에서 거주하면 한국 일을 맡아 줄 사람이 필요할 것 같은데.
‘BEAUTY IN SEOUL’ 한국 지사장이 있다. 토니 대표인데, 한국말을 잘하는 영국인이다. 내가 필리핀에 오래 있다 보니 한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대신 해주고 있다. 처음부터 사업을 같이 한 파트너이자 오른팔 같은 친구다.

한국말을 잘하는 영국인이라는 것이 특이하다. 어떻게 알게 된 사이인가?
지인의 소개로 만났다. 나와 DNA가 비슷한 사람인 것 같았다. 처음부터 코드가 잘 맞았다. 나는 대학을 프랑스에서 나왔고, 토니 대표는 영국에 있었다. 유럽에서 생각보다 한국 사람을 만나기 쉽지 않다. 화장품 사업에 대한 생각이 통해서 내가 같이 사업을 하자고 제안했다.

어떤 부분에서 생각이 통했나?
단일 브랜드 스토어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글로벌 브랜드를 제외한 중저가 브랜드가 단일 로드샵으로 살아남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있었다. 처음엔 둘이서 브랜드 잡는 것도 힘들었다. 필리핀에서 사업을 한다고 하면 모두 무시했다. 사람들은 오로지 중국만 생각했다. 지금은 가만히 있어도 브랜드들이 찾아오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브랜드 선정 기준이 있을 것 같은데?
제품 샘플과 가격, 마케팅이다. 필리핀은 아직 고가 상품이 잘되는 시장이 아니다. 괜찮은 디자인에 거품을 뺀 제품이 잘나간다.

필리핀 사람들도 화장을 많이 하나?
그들이 화장을 시작한 건 4,5년 전 부터다. 지금은 스킨케어가 뭔지 안다. 토너, 에센스, 에멀전 제품들도 팔리는 시기가 왔다. 조금씩 더 재밌는 시장이 되고 있다.

어떤 라인이 제일 잘 나가나.
베이직 라인이다. 비비크림, 썬블럭, 립스틱, 틴트, 아이브로우 같은 기본적인 것들이 꾸준히 나간다.
▲키오스크 형태의 ‘Beauty in Seoul' 매장
▲키오스크 형태의 ‘Beauty in Seoul' 매장
날씨에 따라 화장품도 영향을 많이 받을 것 같다.
물론이다. 필리핀에서는 수분크림이 안 된다.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는 수분크림, 오일 베이스가 잘 되지만 필리핀은 건기와 우기밖에 없다. 이런 나라는 뽀송뽀송한 걸 좋아한다. 베이비 파우더가 제일 잘 팔린다. 립글로즈, 립밤 같이 기름기가 많은 화장품은 바르지 않는다. 필리핀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선 그런 걸 알아야 한다. 그냥 제품을 생산해 팔려고 하면 잘 안 된다. 이쪽 시장을 확실하게 알고 겨냥해서 만들어야 한다.

‘LIPSTICK PLEASE’의 실패로 얻은 노하우인가?
그렇다. 화장품뿐만 아니라 매장도 마찬가지다. 예전엔 매장이 크고 화려했다. 매스컴도 많이 탔지만 돈은 못 벌었다. 매장 크기는 중요하지 않다는 걸 그 때 깨달았다. 그래서 지금 매장은 다 작은 키오스크 형태다. 물론 어느 정도 커지면 큰 매장도 필요하다. 매출보다는 마케팅적으로.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돈을 벌어다주는 건 작은 매장들이다.

‘BEAUTY IN SEOUL’로 다시 일어나기까지 많은 노력이 있었을 것 같다.
필리핀에서 발로 뛰며 시장조사를 했다. 토니 대표와 하루 종일 몇 명이 지나가는지 세 봤다. 어느 곳이 유동인구가 많은지 파악하기 위해서다. 그들이 얼마를 가지고 다니는지 소비 패턴도 파악했다. 기준점을 5만원으로 잡고 지갑에 5만원 이상 있는 곳은 A급 매장, 이하는 B급 매장으로 분류했다. A급 매장엔 고가 제품도 같이 진열하고, B급 매장엔 저렴한 것만 진열했다.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A급 매장에 있는 고가 브랜드도 팔리긴 하나?
A급 매장의 고가 브랜드 중 자트 ‘S.A.A.T INSIGHT’가 있다. 이 제품은 필리핀 시장에서 높은 가격대지만 잘 나가고 있다. 대표적으로 헤어 고데기, 슬리핑젤이다.

이유가 뭐라 생각하는가?
헤어 쪽을 겨냥한 제품 차별성, 디자인에 영어를 많이 사용해 소비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한 것이 매출에 영향을 준 것 같다. 한마디로 필리핀과 궁합이 맞는 게 아닌가 싶다. 나도 고가의 제품이 이렇게 팔리는 게 신기했다.

필리핀에 K뷰티를 알리는 선두주자로써 목표는?
필리핀에서 매장을 100개까지 확보하는 게 1차 목표다. 그리고 오프라인과 온라인, 사업모델을 동남아로 넓히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필리핀에서 탄탄하게 자리를 잡아야 한다. 그 다음엔 홍콩, 베트남, 인도로 점점 넓혀갈 예정이다.

필리핀 시장을 바라보는 화장품 업계 사람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간과했던 아세안 시장을 다시 생각해줬으면 한다. 아세안 9개국을 다 합하면 중국만큼 사람이 많다. 이 시장에 맞는 제품을 만든다면 성공 할 확률이 높다. 아세안 시장을 위한 K-뷰티 브랜드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선 좋은 재료로 비싸게 만드는 게 아니라, 가볍고 효과적이며 쓸데없는 거품을 뺀 제품이 나와야 한다. 한국은 화장품을 워낙 잘 만든다. 결국 어떤 타깃을 상대로 만드느냐가 중요하다.

글=태유나/사진=이승현 한경텐아시아 기자 youyou@tenas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