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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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행에서 44년 만에 연임 총재가 나왔다.

청와대가 2일 이주열 한은 총재(66)의 연임을 결정하면서다. 총재 연임 사례는 1974년 김성환 전 한은 총재 이후 없다. 한은 총재가 금융통화위원회 의장을 맡기 시작한 1998년 이후엔 처음이다.

지난 4년 무난했던 중앙은행 운영 능력과 세계 주요국과 통화스와프 체결 등의 업적을 고려한 인사로 해석된다. 무엇보다 글로벌 통화정책이 변곡점에 놓여 있어 통화정책의 연속성에 가장 큰 무게 중심을 둔 인사라는 평가가 많다.

이 총재의 연임 결정은 거시경제 상황을 안정적으로 끌고 가겠다는 청와대의 의지라는 분석이 많다. 미국이 갈수록 통화정책 정상화에 속도를 내고 있는 상황에서 보호무역 주의 강화와 자동차업계의 구조조정 등으로 한국 경제의 대내외 변수가 불거진 상황이다. 자칫 정책적 오판은 경기 회복의 불씨를 꺼뜨리거나 부작용을 가중시켜 한국 경제에 부담을 초래할 수 있다. 정교한 정책적 대응이 요구되는 시점인만큼 통화정책의 연속성에 무엇보다 방점을 뒀다는 의미다.

이 총재는 임기 초반에는 ‘매파’(통화긴축 선호)적인 성향을 부각시켰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를 거치며서 기준금리를 사상 최저 수준까지 내려 경기회복을 지원했다. 결과적으로는 지난해 3년 만에 3%대 경제성장률을 회복했다. 아직 목표치(2%)를 밑도는 물가상승률은 해결해야 할 과제지만 무난하게 거시경제 상황을 관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통화스와프를 통해 외환안전망을 탄탄하게 짠 점은 주요 업적으로 꼽힌다. 이 총재는 지난해 10월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보복을 딛고 진통 끝에 한·중 통화스와프 연장 합의를 이끌어 낸 데 이어 지난해 말에는 캐나다와 무제한·무기한 통화스와프를 체결했다. 지난달에는 스위스 중앙은행과 통화스와프를 맺기도 했다. 한은 안팎에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통화신용정책 담당 부총재보로 일했던 경험과 네트워크가 반영된 결과로 이해했다.

통화정책의 중립성을 중시하는 선진국에서 중앙은행 총재의 연임이 보편화하고 있는 흐름도 영향을 미쳤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중앙은행 임기는 길게는 8년까지 보장돼 있고, 연임해서 10년 이상 재임하는 경우도 많다. 미국 중앙은행(Fed)은 재닛 옐런 전 Fed 의장을 제외하면 대부분 연임하거나 장수했다. 유럽중앙은행(ECB)과 영국 중앙은행(BOE)의 총재 임기는 8년이며, BOE 연임이 가능하다. 저우 샤오촨 중국인민은행 총재는 2002년부터 16년째 재임하고 있으며, 최근 일본 정부는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 중앙은행 총재의 연임을 결정했다.

이 총재는 박근혜 정부 때 발탁됐지만 정치색이 없는 통화정책 전문가로 통한다. 오히려 전 정부에서 임명됐음에도 현 정부 경제팀과 호흡이 잘 맞는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다. 이 총재는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취임 후 지난 8개월 동안 5차례나 만나 경제 현안을 허심탄회하게 논의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오는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청문회 리스크’를 줄일 수 있다는 점도 연임 결정에 크게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연임의 경우에도 국회 인사청문회를 실시하지만 이 총재는 4년 전 청문회에서 별 다른 잡음이 없었다.

청와대는 고위공직 후보자 인사 검증과 관련해 지난해 11월 문 대통령의 기존 5대 인사원칙(병역 기피, 세금 탈루, 불법적 재산 증식, 위장전입, 연구 부정행위 등 불가)에다 음주운전과 성 관련 범죄를 추가해 7대 원칙을 세웠다. 2013년 말 한은법 개정으로 총재도 인사청문회를 거쳐야 하는 자리로 바뀌었다. 2014년에도 당초 거론되던 유력 인사들이 청와대 인사 검증에서 잇따라 낙마하면서 이 총재가 발탁됐다. 한은 출신은 상대적으로 개인 관리에 철저해 인사청문회에 유리하다는 평가가 많다.

특히 이번에 이 총재와 함께 유력하게 거론됐던 학자와 한은 출신 ‘OB(올드보이)’들도 인사 검증 과정에서 문제가 불거진 것으로알려졌다.

이 총재의 연임 2기 체제 여건은 녹록지 않다. 국내외 문제를 함께 해결해야 하는 ‘기준금리 딜레마’에 놓여 있다. Fed가 당장 오는 21일 기준금리를 올릴 가능성이 커졌다. 현재 기준금리는 한국이 연 1.50%, 미국이 연 1.25~1.50%다. 미국이 이달 기준금리를 올리면 한·미 간 금리가 역전된다. 한은도 기준금리 인상을 서둘러야 하는 시점이지만 국내 경기 회복세가 충분히 강하지 못한 데다 일자리 증가가 미미한 게 변수다.

여기에 미국의 통상압박까지 더해지면서 수출 경기도 불투명해지고 있다. 이 때문에 지난해 11월 말 6년 5개월 만에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인상한 한은은 1월에 이어 지난달에도 기준금리를 연 1.50%로 동결했다. 1450조원을 넘어선 가계부채의 소프트랜딩(연착륙)도 이 총재가 짊어져야 할 과제다.

김진일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이 총재는 지난 4년간 세월호로 인한 침체를 제외하면 큰 충격 없이 정책을 수행했다”며 “하지만 앞으로 남은 4년의 대내외 환경은 지난 4년보다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은정 기자 ke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