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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6일 경기 안양의 한 호텔 뷔페 식당. 대한전선 임직원들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이날은 채권단 자율협약 졸업식에 이어 회사의 새 최대주주 IMM 프라이빗에쿼티(PE)의 ‘타운홀 미팅’이 열리는 날이었다.

2009년 하나은행과의 재무구조 개선 약정 이후 6년여간 고달픈 시기를 견뎌온 임직원들은 IMM PE가 또 한 번 고강도 구조조정 대책을 내놓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무대에 선 송인준 IMM PE 대표의 발언은 예상을 빗나갔다. 송 대표는 전 임직원을 대상으로 한 스톡옵션 부여와 별도의 격려금 지급을 약속했다. 무리한 사업 확장에 따른 재무구조 악화로 ‘축소 경영’을 이어온 대한전선이 새로운 도약을 선언하는 순간이었다.
채권단 '축소경영' 딛고 기술력 키워 시장 지배력 회복
◆재앙이 된 진로 채권 대박

국내 최초의 종합 전선제조업체 대한전선은 1955년 설립된 이후 2008년까지 단 한 번도 적자를 낸 적이 없는 회사였다. 문제가 생긴 것은 전선사업 성장이 둔화하자 경영진이 다른 사업으로 눈을 돌리면서다.

2003년 우연한 기회에 3500억원을 투자한 진로 채권이 2년 만에 100% 넘는 수익을 냈다. 이에 고무된 경영진은 남부터미널, 무주리조트, 트라이브랜즈(옛 쌍방울), 필리핀 세부리조트, 캐나다 힐튼호텔 등 전선업과 관련 없는 사업과 부동산에 문어발식 투자를 이어갔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투자 자산의 가치가 급락했다. 부채는 약 1조9000억원(2007년 말)으로 불어났다. 재무구조가 악화되면서 대한전선은 2009년 주채권은행인 하나은행과 재무구조 개선 약정을 체결한 데 이어 2012년에는 채권단 자율협약에 들어갔다.

채권단 관리 아래에서 회사 경쟁력은 더 추락했다. 정상화를 위해선 신규 자금을 수혈해야 하는데 차입금이 2조원에 달하는 상황에서 추가 대출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다급한 상황은 출혈 판매로 이어졌다. 대한전선은 당장 회사를 굴릴 현금을 확보하기 위해 5000원에 구리를 구매해 구리나선으로 가공한 뒤 4900원에 파는 무리수를 뒀다.

◆구원투수로 등판한 IMM PE

하나은행 등 채권단은 2013년 말 7000억원 규모의 출자전환을 한 뒤 2014년 공개입찰을 통해 보유 지분 매각에 나섰다. 한앤컴퍼니가 단독으로 응찰했지만 가격이 맞지 않아 무산됐다.

상황을 지켜보던 IMM PE는 채권단에 신주를 발행하는 방식의 새로운 거래를 제안했다. 기존 주식에 대해 5 대 1 감자를 하고 IMM PE가 3000억원의 유상증자를 통해 대한전선 지분 70%를 확보하는 구조였다. 일부 은행의 반대에도 IMM PE는 “뉴머니(신규 자금) 없이 회사를 살릴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워 2015년 9월 조건을 관철시켰다.

유상증자를 통해 들어온 3000억원은 대한전선에 ‘단비’와 같았다. IMM PE는 3000억원 중 1000억원은 채권단 차입금 상환, 1000억원은 우발채무 해결, 나머지 1000억원은 연구개발(R&D) 등 미래를 위한 투자에 쓴다는 방침을 세웠다. 출혈 판매는 중단했다.

인수 전 2170%에 달한 부채비율이 곧바로 249%로 떨어졌다. 재무 건전성이 개선되자 그동안 발주를 꺼리던 국내외 고객사들이 주문을 재개했다. 대한전선의 초고압케이블 수주량은 2015년 2425억원에서 지난해 6008억원으로 급증했다.

◆원가 경쟁력과 시장 지배력 회복

IMM PE는 일진전기 사장 출신인 최진용 사장을 최고경영자(CEO)로 선임했다. 1977년 대한전선에 입사해 15년간 일하다 일진전기로 옮겨 최장수 CEO를 지낸 업계 전문가다. 최 사장은 지친 직원들의 기(氣)를 살리는 ‘기 경영’을 통해 조직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후 원가 경쟁력을 회복하기 위한 본격적인 혁신에 돌입했다. ‘불량과의 전쟁’이 대표적이다. 공장 유니폼에 ‘불량 죽음, 품질 생존’이라는 문구를 새겨넣고 치열한 토론을 벌였다. 불량률이 30% 줄었다.

다음은 시장 지배력 확대였다. 부가가치가 높은 해저케이블 등 신제품 개발에 역량을 집중했다. 글로벌 시장 공략에도 본격 나섰다. 베트남과 남아프리카공화국 생산법인의 전열을 가다듬고 전선 교체 수요가 큰 미국과 유럽, 동남아시아 시장을 겨냥했다. 지난 4월 런던에 이어 7월에는 미국 뉴저지 지사도 신설했다.

대한전선의 지난해 매출은 1조3740억원으로 IMM PE가 인수할 당시인 2015년 1조6887억원에 비해 오히려 19%가량 줄었다. 대신 영업이익은 281억원에서 487억원으로 73% 늘었다. 적자 매출을 중단하고 초고압케이블 등 고부가가치 제품에 집중한 결과다. 인수 당시 주당 500원이던 IMM PE의 지분 가치는 1200원대로 뛰었다.

유창재 기자 yooco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