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잠도 훔치겠다"…시간약탈자의 등장
스위치 버튼을 꾹 누른다. 실내 조명이 은은하게 바뀌고 스마트폰은 매너 모드로 전환된다. 동시에 노트북에선 동영상 스트리밍 업체 넷플릭스의 드라마가 시작된다. 중간에 배가 고파도 영상을 멈추고 일어나 냉장고를 뒤지지 않아도 된다. 스위치 버튼을 또 누르면 사전에 설정해 둔 음식이 자동 주문된다. 드라마를 보다가 잠에 빠져들어도 괜찮다. 영상이 알아서 꺼지기 때문이다. 당신의 움직임이 없으면 신고 있던 양말에 달린 센서가 작동해 영상을 정지시킨다.

"당신의 잠도 훔치겠다"…시간약탈자의 등장
2015년부터 시작된 넷플릭스의 ‘메이크잇 프로젝트’ 중 ‘넷플릭스 스위치’와 ‘넷플릭스 양말’(사진) 얘기다. 다른 어떤 것에도 방해받지 않고 콘텐츠를 즐기고, 잠이 든 순간에도 무의식적으로 넷플릭스와 함께하도록 한 제품들이다. 돈 주면 쉽게 사는 그런 물건도 아니다. 넷플릭스가 별도로 제작한 영상을 보고 재료를 구해 뜨개질도 하고 프로그래밍 기술도 익혀 만들어야 한다.

이걸 누가 할까 싶다. 하지만 영상 조회 수는 150만 건을 넘었다.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라도 넷플릭스만의 가치와 즐거움을 누리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는 얘기다. 한 가지 궁금해진다. 넷플릭스는 왜 굳이 이런 일을 벌였을까. 리드 헤이스팅스 최고경영자(CEO)는 한마디로 설명한다. “우리는 당신의 잠과도 경쟁한다.” ‘시간 약탈자’의 등장이다.

넷플릭스로부터 시작된 ‘시간 전쟁’이 확산되고 있다. 페이스북, 애플, 디즈니 등이 잇따라 자체 동영상 제작과 공급을 선언하고 나섰다. 이들의 목표는 넷플릭스와 같다. 대중의 모든 시간, 심지어 잠자는 순간까지 훔치는 것이다.

‘대중의 시간’에 관심을 두는 것은 브랜드 가치와 직결된다. 스타벅스가 그 증인이다. 스타벅스는 더 이상 단순한 커피 가게가 아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는 집 밖 공간이다. 어떤 매장에 가도 와이파이에 연결할 수 있고 전원도 있다. ‘학교도 집도 아닌 제3의 공간을 만들라’는 경영철학이 새 브랜드 가치를 확장하고 있다. 반면 대중의 시간을 잃으면 수명도 그만큼 짧아진다. 플랫폼의 절대 강자였던 야후는 2006년 구글이 유튜브를 인수하며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자 서서히 사라져갔다.

페이스북, 애플 등도 야후의 교훈을 잘 알고 있다. 이들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단말기만으로는 시간을 잡아두는 데 한계가 있다는 점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콘텐츠가 흐르는 곳에 대중의 시선이 머무르고, 나아가 시선이 쌓일 시간 자체가 다가온다는 것도 말이다.

깨달음은 실행으로 이어졌다. 이들도 콘텐츠 시장에 대한 공습을 시작했다. 페이스북은 지난 8월 미국에서 40여 편의 쇼를 담은 ‘워치’ 페이지를 공개했다. 애플은 최근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과 쇼 프로그램을 제작한다고 발표했다. 넷플릭스에 콘텐츠를 공급하던 디즈니는 8월 결별을 선언했다. 자신만의 자체 스트리밍 시스템으로 콘텐츠를 내놓기로 했다.

이 전쟁의 승패를 가를 가장 중요한 요소는 ‘몰입’이다. 콘텐츠 소비자들이 시간의 흐름 자체를 잊도록 하는 것. 선두 주자는 역시 넷플릭스다. 넷플릭스의 ‘빈지워치(binge watch·몰아보기)’ 전략은 일상화됐다. 빈지워치는 자체 제작한 작품의 한 시즌을 통째로 한번에 올리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밤을 새워 한 시즌을 ‘정주행’한 넷플릭스의 고객 수는 840만 명을 넘어섰다.

몰입 전략은 더욱 진화하고 있다. 페이스북은 워치에 ‘페이스북 친구가 보고 있는 것’ 메뉴를 구성해 지인들이 어떤 영상을 즐기는지 알 수 있게 한 뒤 따라 보도록 유도한다. 서로의 취향을 탐내고 공유하고 싶어하는 심리도 강력한 몰입 상태를 만들어내는 법이다.

이 전쟁을 보고 있으면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 있다. 국내 기업들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 넷플릭스가 지난해 1월 한국에 진출한 전후 갑자기 국내 기업들의 유사 서비스가 쏟아지는 정도다. 그들의 플랫폼 밑으로 들어갈 것인가, 그들과 경쟁하며 함께 살아갈 것인가. 국내 기업들은 기로에 섰다. 거대하고 은밀한 시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생존을 위한 새로운 스위치 버튼을 발견하느냐가 국내 플랫폼 등 기업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