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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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회사의 출자자인 주주는 회사 채무에 대해 개인적으로 책임을 지지 않는다. 따라서 회사의 채권자 등 이해관계자를 보호하기 위해 출자금으로 이뤄지는 ‘자본금’이라는 개념을 인정하고, 자본금에 상응하는 회사 재산이 현실적으로 회사에 확보되도록 하는 ‘자본금충실원칙’을 두고 있다. 만약 회사가 회사 설립이나 유상증자를 하면서 당초부터 진실한 주금(株金)납입 의사 없이 형식상 출자금을 납입받아 증자등기를 하고, 그 직후 출자금을 인출해 출자자에게 반환해 주면 자본금충실원칙을 해치는 가장납입(假裝納入)행위가 된다. 다만, 그 출자금의 반환이 출자자에 대한 회사채무를 변제하는 등 회사를 위한 사용이었다면 가장납입이라 할 수 없다.

회사 대표이사 등의 가장납입행위에 대해 주금납입은 유효하지만 납입가장죄와 공정증서원본불실기재죄로 처벌하고, 회사 재산에 대한 횡령죄나 배임죄로는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이 2004년 6월17일 대법원이 선고한 2003도7645호 전원합의체 판결(이하 ‘레이디사건 판례’) 이후 법원의 일관된 입장이다. 일본 판례는 이런 경우 주금납입을 무효로 보고, 납입가장죄와 공정증서원본불실기재죄를 인정하고 있다.

가장납입인가 실제납입인가?

한석훈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전 부장검사
한석훈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전 부장검사
‘레이디사건’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A는 자신이 지배하는 회사 G의 주식회사 L에 대한 채권 90억원을 회수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미 부도처리된 L회사의 대표이사 B와 투자계약서를 작성하면서, G회사가 L회사의 부도어음·수표를 회수하거나 운영자금을 대신지급·지출하되 L회사는 유상증자를 해 G회사를 포함한 A 측 회사에 그 신주를 모두 배정하고, 그 주금인출금으로 G회사에 대한 위 채무를 상환해 주기로 약정했다. 이 약정에 따라 G회사는 L회사 발행 부도 어음·수표 액면금 합계 258억원가량을 그 액면금에 훨씬 못 미치는 금액으로 회수하고, L회사의 노동조합원들에 대한 20억원의 퇴직금 채무를 지급보증했다. 그리고 L회사는 신주 310만 주를 주당 9700원으로 발행하는 유상증자를 해 제3자배정 방식으로 G회사를 포함한 A 측 회사에 배정했다. 주식인수인인 A 측 회사는 그 납입금 300억7000만원을 사채업자 C로부터 차용한 250억원에 다른 자금을 합해 전액 납입한 뒤 같은 날 증자등기를 했고, B는 그 다음날 위 납입금 전액을 인출해 A 측 회사에 지급, A가 C로부터 차용한 금액을 변제하게 했다.

레이디사건의 원심 판결은 A가 B와 공모해 위 증자대금 300억7000만원의 납입을 가장한 납입가장죄, 그리고 L회사의 자본금총액, 발행주식총수에 관한 허위사실의 증자등기를 마치게 한 공정증서원본불실기재죄와 L회사의 위 300억7000만원을 인출해 임의로 처분한 업무상횡령죄가 성립한다고 판단했다.

회사채무 갚았다면 가장납입 아니야

그러나 대법원은 위 300억7000만원 중 G회사가 소지한 L회사 발행 부도 어음·수표의 합계 금액 258억원(가장채권은 제외) 또는 위 퇴직금 대위지급 채권금액에 관해서는 L회사 입장에서는 유상증자를 통해 동액 상당의 회사채무를 소멸시킨 것이어서 그 범위에서는 인출한 주금을 회사를 위해 사용한 것으로 볼 수 있으므로 A나 B에게 가장납입의 의사가 없었다고 볼 여지가 있다고 판시했다.

또 대법원은 가장납입에 의한 유상증자라고 할지라도 “실질적으로 회사의 자본금(‘자산’의 의미로 보임)을 증가시키는 것이 아니고 주금의 납입 및 인출 전 과정에서 회사의 자본금에는 실제 아무런 변동이 없으므로 회사자금을 임의로 유용한다는 불법영득의사(不法領得意思)나 재산상 이익을 취한다는 의사를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횡령죄나 배임죄의 성립은 부인하고, 납입가장죄와 공정증서원본불실기재죄만 인정했다.

주금납입 효력은 유효, 납입가장죄는 성립

레이디사건 판례에 의하면 가장납입일지라도 민사상 거래안정성을 위해 주식인수나 주금납입의 효력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발행된 주식은 유효하고 그 주권을 소지한 주주는 주주권을 온전히 행사할 수 있다. 그리고 위와 같이 가장납입한 주식인수인은 발행회사에 대해 반환받은 인출금액 상당의 체당금(替當金·회사가 주식 인수인 대신 주금을 납입한 돈) 또는 차용금 채무를 부담하므로 회사채권자는 발행회사의 주식인수인에 대한 그 회사채권에 대해 강제집행을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납입은 증가한 자본금에 상응해 출자된 주금이 사실상 회수가 어려운 채권 형태로 존재하는 등 실질적으로 회사의 자본금충실을 침해할 위험이 있으므로 납입가장죄의 성립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공정증서원본불실기재죄란 등기사항이 민사실체법상 권리관계에 부합하지 않는 허위사실인 경우에 성립하는데, 가장납입의 경우 문제가 되는 등기사항은 자본금총액과 발행주식총수다. 그런데 가장납입의 납입효력을 유효로 보는 경우에는 물론이고 그 납입을 무효로 보더라도 주식회사의 경우 변경등기 후 유상증자의 납입이 무효가 되면 이사들이 이를 공동인수한 것으로 간주되므로 발행주식총수나 그와 관련해 정해지는 자본금총액에도 변경이 없다. 따라서 가장납입의 경우에도 공정증서원본불실기재죄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전환사채 가장납입은 배임

한편 회사의 대표이사가 주식으로 전환할 수 있는 전환사채의 사채대금 납입을 가장한 경우에는 최근 대법원이 업무상배임죄의 성립을 인정해 주목받고 있다. 즉, 전환사채의 인수인이 그 발행회사의 대표이사와 공모해 제3자로부터의 차용금으로 사채대금을 납입하고, 변경등기 직후 납입금을 인출해 제3자에 대한 차용금을 변제한 사안에서, 발행회사의 대표이사로서 사채대금이 모두 납입돼 실질적으로 회사에 귀속되도록 조치할 업무상 임무에 위배해 전환사채 인수인에게 인수대금 상당의 이득을 얻게 하고 발행회사에 같은 금액의 손해를 가한 것이므로 업무상 배임죄에 해당한다고 판시하고(대법원 2015년 12월10일 선고 2012도235 판결), 공정증서원본불실기재죄는 적용하지 않았다. 전환사채는 사채의 일종이기는 하지만 나중에 전환권이 행사돼 신주가 발행되고 사채가 소멸하면 사채대금의 가장납입이 발행회사의 자본금충실 침해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주금 가장납입의 경우와 유사하다.

■ 주금(株金) 가장납입도 '전환사채 사례'처럼 배임죄 요건 충족

주금납입의 효력을 유효로 보는 판례 입장에서 납입 주금은 일단 회사재산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 인출한 주금을 회사를 위해 사용하지 않고 개인인 주식인수인에게 반환하더라도 회사의 재산상 손해나 주식인수인의 이득을 인정하지 않고 배임죄의 성립을 부인하는 ‘레이디사건’ 판례는 대부분 학자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위 전환사채 사례(대법원 2015년 12월10일 선고 2012도235 판결)와 비교해 보더라도, 납입대상이 주금과 사채대금이라는 차이가 있고 그에 따라 회사가 부담하는 의무의 내용에 차이가 있을 뿐 △임무위배행위 △회사의 재산상 손해 △행위자나 제3자의 이익 취득이란 배임죄의 구성요건을 충족하는 점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따라서 향후 주금 가장납입의 경우에도 납입주금이라는 회사재산에 대한 배임죄로 법을 적용하는 판례변경이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

만약 업무상배임죄가 적용되는 경우에는 이득액이 5억원 이상이면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제3조가 적용돼 가중처벌될 수 있다.

한석훈 <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전 부장검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