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는 다른 작품보다 훨씬 더 큰 책임감을 느끼는 작품이에요.신작을 쓰고 있는 중이라 사실 돌아다닐 형편이 아니지만 '소년이 온다'와 관련된 일이라 나왔어요."
장편소설 '채식주의자'로 맨부커 인터내셔널을 수상하며 세계적인 작가 반열에 오른 소설가 한강(47)이 4일 저녁(현지시간) 이탈리아 로마 중심가의 대형 서점에서 사인회를 열어 독자들과 만났다. 이날 행사는 지난 달 '인간의 행위'(Atti Humani)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된 '소년이 온다' 이탈리아어판 출간에 맞춰 출판사 아델피(Adelphi)가 이탈리아 유명 서점 체인인 펠트로넬리와 손잡고 마련했다.
1년 전 현지에 번역 출간된 전작 '채식주의자'의 인기에 한강 작가가 '소년이 온다'로 이탈리아의 권위있는 문학상 말라파르테상의 올해 수상자로 선정된 소식 등이 더해지며 서점에는 한 작가를 직접 만나보려는 문학 애호가들이 한 작가의 책을 손에 집어 든 채 길게 줄을 섰다.
한 작가는 자신을 찾아온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물으며, 책 앞면에 정성스레 사인을 해줬다.
일부 독자들은 사인이 진행되는 짧은 시간을 이용해 한 작가에게 작품에 대한 궁금증을 묻기도 했다.
남자 친구와 함께 온 20대 후반의 이탈리아 독자 로젤리나는 "'채식주의자'를 감명 깊게 읽었다"며 "작가의 신작도 어서 읽고 싶다"며 갓 구입한 '소년이 온다' 이탈리아어 번역판을 작가에게 내밀었다.
로마에 있는 국제기구인 유엔식량농업기구(FAO)에서 일하는 영국인 줄리언 플러머 씨는 "한 작가의 팬"이라며 영문판 '소년이 온다' 앞면에 사인을 받고 활짝 웃었다. 서점 측은 "한강 작가의 말라파르테 수상 소식이 전해진 뒤 서점에 있던 '채식주의자'와 '소년이 온다' 영문판 각각 10여권이 순식간에 동났고, 이탈리아어판 역시 외국 작가의 소설 가운데 눈에 띄게 잘 팔리고 있다"고 전했다.
이날 모인 한국 교민들을 비롯한 상당 수 독자들은 출판사가 잡은 바쁜 일정을 소화하느라 작가의 세계를 엿볼 농밀한 대화 시간은 마련되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움을 표현하기도 했다.
한 작가는 사인회 틈틈이 나눈 기자와의 문답에서 내년 출간을 목표로 신작을 쓰고 있는 중이라 외유가 부담스러웠지만 '소년이 온다'에 관련된 행사이기 때문에 작년 '채식주의자'출간 행사에 이어 올해도 이탈리아를 찾았다고 밝혔다.
한 작가는 "'소년이 온다'에 (다른 작품보다 )훨씬 큰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며 "단순히 제 이야기를 넘어서 1980년 광주를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소년이 온다'는 1980년 광주에서 벌어진 5·18 광주민중항쟁을 배경으로 계엄군에 맞서다 죽음을 맞게 된 중학생 동호와 주변 인물들의 참혹한 운명을 그린 작품이다.
한 작는 지난 1일 남부 카프리 섬에서 열린 말라파르테상 수상 소감에서도 "존엄과 폭력이 공존하는 모든 장소, 모든 시대가 광주가 될 수 있다"며 "이 책은 나를 위해 쓴 게 아니며, 단지 내 감각과 존재, 육신을 (광주민중항쟁에서) 죽임을 당한 사람, 살아 남은 사람, 그들의 가족에게 빌려주고자 했을 뿐"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한 작가는 당시 시상식에서 "결국은 (내가 그들을 도운 게 아니라) 그들이 나를 도와줬음을 깨달았다"며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단지 책 한 권을 썼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이 소설을 읽으며 많은 독자들이 주인공들에게 닥치는 비극에 책장을 넘기기 힘들었다고 토로한 만큼 작가가 글을 쓰며 느끼는 고통은 더 컸을 것 같다는 말을 건네자 한 작가로부터 "그곳에서 희생된 사람들도 있는데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과거 정권에서 문화예술가들을 핍박하는 수단으로 쓴 소위 '블랙리스트'에 오른 작가이기도 한 그에게 블랙리스트 관련 질문을 던지자 "작가는 작품으로 이야기해야 하는데, 지금은 새로운 작품을 내놓은 것도 아니라서 (이 문제와 관련해) 발언하는 건 좀 그렇다"고 답변했다.
한강 작가는 5일에는 이탈리아 북부 밀라노로 올라가 독자들을 만난 뒤 6일 귀국한다.
그는 "곧 영국에서 작년에 내놓은 신작 '흰'이 번역돼 나올 예정이라 그때 맞춰 영국을 방문하는 일정을 빼고는 당분간은 오롯이 새로운 소설을 쓰는 작업에 집중할 것 같다"고 말했다. (로마연합뉴스) 현윤경 특파원 ykhyun14@yna.co.kr